자기 부정의 길

c1a6b8f1_bef8c0bd.png어제 밤  거룩한 예식을 축복하듯 하얀 눈이 내린다. 세상을 등지고 주님이 걸어가셨던 고독의 길을 걷겠노라고 고백하며 관에 누웠던 세 분 믿음의 사람의 고백이 주님의 마음을 흡족케 하신 걸까. 뒤뜰에도 앞마당에도 장독 위에도 하얀 첫눈이 내린다. 뜰의 오동나무 위에도 하얗게 눈이 내리니 주님 따라 일평생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던 나의 스승님이 떠오른다. 피 땀으로 얼룩진 병상생활의 연속이었지만, 백합 같은 순결한 삶을 오롯이 예수님에게만 40여년을 하루처럼 산 제물로 바치셨다. 그리움에 사무쳐 하늘을 보니 눈꽃송이 너울너울 이마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선생님께서 주님 앞에 가시던 그날도 이렇게 하얀 눈꽃이 날렸다.

유난히 추운 동지 달 밤을 꼬박 새우며 주님을 찾던 그날도 눈이 소복이 내렸다. 새벽녘 눈길을 헤치고 주님은 못난 이 죄인을 찾아오셨다. 죄인 중에 괴수인 나를 측은히 여기시며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살아생전 선생님도 이 말씀을 가장 좋아하셨다. 뼈 속 깊이 스며들며 사무쳤던 그 말씀이 다시금 내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이렇게 눈이 오는 날이면 맨발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걸어가신 주님 생각에 목이 멘다.

동고동락하던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이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을 지나던 중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사람들이 말한다고 답변하였다. 그러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6:15)고 재차 물으셨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16:16)라며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였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너는 반석이다.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시며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셨다. 깜짝 놀란 베드로는 주님, 그리 마옵소서.”라며 강하게 만류를 하였다. 그 순간 주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 하는구나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4-25). 참으로 준엄하신 자기 부정의 길을 제시하셨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 부정의 길이다. 내 생각, 내 뜻, 내 계획 모든 것을 순간순간 내려놓아야만 갈 수 있는 길이다. 인간의 정에 매이면 결코 걸어갈 수 없는 좁고 협착한 길이다. 설사 크나큰 희생과 손해와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따라야 하는 길이다. 자기 부정 없이는 십자가를 질 수도 없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나를 완성 할 수도 없다.

나를 없애고, 자신 속에 오로지 주님만이 살아계시길 원했던 이용도 목사님도 일평생 자기 부정의 길을 걸어가셨다. 매서운 칼바람이 불고 눈발이 날려도 홀로 인왕산에 올라가 열흘 동안 꼼짝도 않고 기도만을 드렸다. 자기를 순간순간 부인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던 그의 노래가 우리의 가슴을 저민다.

나의 노래가 있음은 주를 위함이요. 나의 눈물이 있음도 오로지 주를 위함이로다. 나의 전체는 주를 위하여 있어 비로소 생명이 있음이다. 보는 눈, 듣는 귀, 말하는 입, 글 쓰는 손, 느끼는 맘, 다 주를 위하여 움직이어서만 하늘을 흔들고 땅을 주름잡나니 그 가운데서 인간들도 옛사람에서 죽고 새 사람의 탄생이 있었음이니라. 모름지기 너는 주님만이 너의 전체가 되라. 오로지 너의 이것저것을 주님을 위하여 쓰일 때만 의미 있고 생명이 있었노라.”

성 프랜시스는 자기 부정의 길을 걷기 위해 버림과 청빈의 삶을 사셨다. 아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자기의 유익과 관련된 모든 것을 버렸다. 21세 되던 해 어느 동굴 속에 들어가서 깊은 명상과 기도에 빠졌는데 그때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 자기를 헌신했고 세상의 것을 모두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포기했고 아버지의 유산과 상속권도 포기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들을 모두 돌려드리겠습니다. 나의 참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는 가난과 고통 자체가 되었다. “나는 가난이란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비애는 나의 자매이고 고통과 죽음은 나의 형제입니다.”

자기 부정의 길은 고통 없이는, 자기 포기 없이는 결코 얻어지지 않는다. 주님께로 가는 길은 죽음으로써 살고, 버림으로써 얻고, 낮아짐으로 높아지고, 비움으로써 채워지고, 부정으로써 긍정에 이르는 자기 부정의 길이다. 이 보잘 것 없는 죄인도 그 길을 걷고자 가슴을 치며 눈물의 기도를 드려본다.

, 거룩한 이들의 뒤를 저도 따르게 하소서. ‘날마다 죽노라고 하신 사도바울의 그 죽음에 저도 동참케 하소서. 엄동설한 추운 밤에 저의 수도실에 오셔서 제게도 자기부인의 은총을 행하도록 빌어주소서. 어쩌자고, 아직도 이 자아가 죽지 않고서 이렇게 팔딱거립니까? 내 속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데 이놈은 죽지 않고 살려고 발버둥 칩니다. 주님, 이 죄인을 날마다 죽여 주옵소서. 어서 죽여주옵소서.”

자기를 죽이지 않고서는 결코 다른 이들과도 화합할 수가 없다.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나를 철저히 죽여야 한다. 나만 철저히 죽는다면 그때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 사신다. 내가 살면 주님이 죽으시고 나를 죽이면 주님께서 사신다. 오직 나를 부인할 때 참된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상대방이 나를 망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망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내 안에 바위 덩어리처럼 단단한 자아가 나의 철천지원수다. 결국 탐욕과 우상단지를 모시고 사는 나 자신이 모든 문제의 시초다. 그래서 이현필 선생님은 자기완성이 우주 완성이다고 하셨다.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 자기를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 나라도 지배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삶이 없으면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진리는 살지 않으면 참으로 경험되지 못한다. 살아보고, 맛보고, 체험하는 산지식이야말로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

옛 선진들이 ()는 유()의 어머니라고 하였다. 십자가는 곧 무아요 죽음이다. 저 앞산의 나무뿌리는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의 어머니이다. 물은 바다의 어머니요, 파도는 물의 날개이다. 고요함은 하늘의 어머니요, 밤은 낮의 어머니요, 별들은 밤의 꽃이다. 죽음은 삶의 뿌리요, ()는 낙()의 어머니요, 그런 까닭에 부활은 십자가가 난 아들이다. 눈물은 기쁨의 뿌리요, 기쁨은 눈물의 딸이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자기 부인이 하나님께로 가는 지름길이다.

눈발이 서서히 걷히고 한 해도 저물어 간다. 오늘도 나는 흙집을 짊어지고 사는 구더기 인생이다. 육신 속에 구더기 같은 삶을 감추고, 남몰래 이 굴레를 벗어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건만 여전히 구더기이다. , 십자가! 나를 미치게 하는 십자가 사랑에 내 혼을 빼어버려야 하리라. 나를 완전히 죽이고 십자가만을 붙들고 나아가야 하리라. 눈물로 밤을 새는 이 밤 붉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피맺힌 절규가 들려온다. 혼을 빼앗는 소리, 넋을 사로잡는 소리에 오늘도 주님을 또 찾는다.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만 사는 자기 부정의 길.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