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것이 옳다

최근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아첨과 간사한 말로 은근슬쩍 거짓말을 하고, 어두운 행실인 것을 알면서도 상대방과 껄끄러워질까봐 맞장구를 치기도 한 일이 있었다. 호기심이나 지친 마음을 위로받고자 수다를 떨거나, 겸손한 척하면서 내 자랑을 늘어놓기도 하였다. 동료의 말을 경청하기보다는 주변의 소란에 휩쓸려 함께 격분하고 비방하기도 하였다. 혀가 힘인 양, 말로 상대방을 이기려고도 하였다. 입술도 내 것이 아니거늘 스스로 주관자가 되어 큰소리를 쳤다.

하나님은 꿈과 이상을 통해 계속 책망하셨다(7:14). 윗니와 아랫니와 머리카락이 숭숭 빠진 내 영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셨다. 그제야 부끄러운 언행들이 필름처럼 스쳐갔다. 주님은 주변의 소란함에 요동치 말고 내 입술에 자물쇠를 채우라고 재차 말씀하셨다. 그동안 이에 초 같은 악한 말로 주님께 큰 고통은 물론이거니와 허탄한 말과 수다스러움으로 주님의 귀가 얼마나 시끄러우셨을까?

이른 아침 말씀묵상을 하는데 마음이 뜨끔했다. 한 절 한 절이 주님의 강한 책망으로 들려왔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12:2-4).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 요즘, 나라도 내 주변도 소란스럽다. 무리의 선동에 이끌려 언성을 높이며 비방할 때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서 허물 많은 죄인들이다. 주위가 소란할수록 주님의 음성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시무언(是無言)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셨던 이용도 목사님은 말한다. “말 없는 것이 옳다. ! 나의 입술아, 너는 삼가 자중하여 가벼이 사람을 이름 짓지 말자. 나의 혼아, 네 누구인데 사람을 판단하느냐. 완전한 판단자는 다만 한 분이 계실 뿐이니라. 세상이 하는 대로 버려두고 그냥 우리는 주께 돌진하여 사명만 다하자.”

세상의 소리를 닫고 조용히 침묵할 때 우리는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들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토머스 아 켐피스는 내적 생활에 더 충실하기 위해서 수다스러움을 피하라고 훈계한다.

할 수 있는 한 세상의 소란스러움을 피하라. 세속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커다란 장애가 된다. 또한 인간은 헛된 것에 오염되기 쉽고 휘말려들기 쉽다. 흔히 내가 말한 후에 잠자코 있었더라면 하고,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하기 일쑤다.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까지는 좀처럼 침묵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서로 어울려 줄곧 마구 지껄여대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수다스러운 이유는 대화를 통해 서로 위로를 얻고자 하고, 온갖 생각으로 지칠 대로 지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자 함이다. 게다가 우리 자신이 가장 좋아하거나 가장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혹은 지독한 골칫거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생각하고 싶어서 안달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러한 말과 생각은 헛된 것이 되기 일쑤며,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이러한 외적인 위안은 진정한 내적 위안을 얻는 데에 적지 않은 손실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기도해야 한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떼제공동체는 세계의 수많은 영혼들을 말과 가르침이 아닌 청빈과 침묵과 겸비의 영성으로, 평화와 일치로 이끌었다. 가르치기에 앞서 인내로 경청하는 것, 준비된 해답을 주기보다 그들의 질문과 의심, 아픔과 좌절, 또 그들이 간직한 열정과 희망을 들어주고 그들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도록 격려하는 것이 떼제 수사들의 역할이다.

창립자 로제 수사는 자신의 말을 설파하기보다는 흔히 밤늦은 시간까지 많은 이들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어린이나 청년을 포함해서 잠시라도 그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그의 부드러운 눈길과 따뜻한 손길을 체험했다.

경청하는 것은 지금도 그들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일부다. 떼제에 와서 침묵 훈련을 하는 사람들이나 장기 자원봉사자들과 함께하는 것 말고도 매일 저녁기도 후에 교회 안에서 여러 형제들이 이 경청하는 봉사를 계속한다. 누군가 떼제의 수사들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가운데 복음을 선포한다.”고 전했다.

그곳에는 심지어 예배나 강론도 없다. 붉은 빛이 감도는 성전의 전면에 켜진 촛불 사이에 세워진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조용히 떼제의 노래를 부르며, 자신을 성찰하고 침묵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전부다. 먹는 것도 초라한 빵 한 개와 보잘것없는 사과 한 개, 코코아 한 잔이 전부다.

떼제 언덕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들에서 일하던 수사들도, 성경을 읽고 있던 수행자도, 나이 많은 노사제도 조용히 십자가 촛불 앞에 모여든다. 그들은 여러 나라의 성경을 자기 언어로 읽고 함께 찬송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함께 긴 침묵의 기도를 드린다.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은 철저히 주님 앞에서 자신의 초라함을 고백하고, 고요한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며 감사를 드린다.

특별히 침묵기도를 하는 이유에 대해 한 노 수사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떼제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 침묵 없이 살았다. 보통 80개국 사람들이 떼제에서 생활한다. 언어 문제는 심각하다. 하고 싶은 이야기 다 못하고 기본적인 소통만 한다. 하지만 기도 모임에서 같이 모여 노래 부르고 침묵할 때 주님 앞에 다 하나가 된다. 복잡한 이야기가 필요 없다. 생활공동체이건 결혼공동체이건,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 다 오해가 있을 수 있고 다툼이 있을 수 있는데, 어떤 때는 용서해 달라고 할 수 없을 때도 있다. 복잡하고 설명도 할 수 없지만 침묵 기도가 끝나고 다 해결됐다.’, ‘용서하게 됐다.’고 말한다. 침묵 기도는 비어 있는 침묵이 아니다. 깊은 친교의 침묵이다. 사람도 서로 잘 알게 되면 계속 많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수많은 말보다 침묵의 위대함을 발견케 된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성난 군중의 외침에도 요동치 않고 침묵하셨던 주님을 본받자. 약혼녀인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충격적인 소식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침묵하며 기도하던 요셉을 닮자.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여리고 성을 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침묵을 삶의 자리에서 되새기자. 수려한 말이 아닌 침묵의 기도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었던 침묵의 영성을 좇자. 상대방이 나를 무시하고 끊임없이 공격할지라도 마음을 지키며 주님께로만 돌진하자. 재판석에 앉아 엄격하게 이웃을 심판하는 일을 멈추고, 이웃의 상처와 아픔에 귀를 기울여보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제아무리 주변이 소란스러워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며 침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웃에게 평화의 사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잠든 밤, 고요한 들판에서 수많은 천사로부터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었던 목자들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기를 소망한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