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의 유연성

유연성(柔軟性)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는 어떤 일을 대할 때, 원리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형편과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대응하는 성질이라고도 하고, “부드럽고 연한 성질, 또는 그 성질의 정도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신체뿐 아니라 뇌도 노화되고 유연성이 없어진다. 그래서 사람의 경우 이 유연성은 몸에도 해당하는 말이고 정신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부드럽고 연한 성질이라는 정의는 몸에 해당되는 정의고, 앞의 정의는 정신 또는 사고의 유연성에 해당되는 정의다.

건강하게 살려면 몸이 유연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의 유연성을 위해, 운동을 하기도 하고 적절한 음식을 먹기도 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곤 한다. 몸이 유연하다고 해서 그 사람 전체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과 사고(思考)의 유연성이다. 몸만 아니라 정신과 사고도 유연하여야만 진정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몸의 유연성을 위해서는 그렇게 시간과 정성을 들여 노력하면서 정신과 사고의 유연성을 위해서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본다. 그러니 더 많은 깨달음과 진리를 가지지 못한다. 주변에서 어떤 사고의 틀 안에 갇혀버려 일생 거기에 매여 사는 예를 종종 본다.

중국 송나라 때 있었던 일이다. 어른들이 모두 일하러 나간 대낮에 동네 아이들이 물이 가득 찬 아주 큰 독에 올라가 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실수로 독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같이 놀던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사람 살려요! 사람이 빠졌어요.’라고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 어른들이 모두 일터에 나간 터라 도움을 줄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은 마땅히 구할 방도가 없어 발만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이때 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한 아이가 앞으로 불쑥 나오더니 큰 돌을 집어 독을 향해 힘차게 내리쳤다. 그러자 독이 깨지면서 쏟아지는 물과 함께 독에 빠진 아이도 함께 밖으로 흘러나왔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면 독에서 꺼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독을 깬다.`는 남다른 생각을 했던 것이다. 바로 이 소년이 송나라 시대의 유명한 대학자 사마광이다.

고정관념에 매여 있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그것을 떠나 새로운 창의력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자면 사고의 유연성을 통해, 새로운 행동반경을 갖게 되고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종종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시면서 자신을 영접하지 않는 그 시대를 한탄하셨다. 장터에서 결혼식 놀이를 하자고 피리를 불어도,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곡을 하여도 꼼짝도 하지 않던 것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모두가 고정관념에 매이고, 사고의 유연성이 없는 모습들인 것이다. 얼마간의 사람들만 주님을 영접했고, 나머지는 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던가? 그래서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던가. 그래야 포도주도 망가지지 않고 부대도 망가지지 않을 테니.

옛날 그리스에 유명한 애꾸눈 장군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군은 죽기 전에 자기 초상화를 하나쯤 남기고자 이름난 화가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나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가 장군의 맘에 영 들지 않았다. 어떤 화가는 애꾸눈 그대로의 장군 얼굴을 그렸고, 또 어떤 화가는 장군을 배려해서 양쪽 눈이 성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장군은 애꾼 눈이 있는 자기의 초상화도 못마땅했지만, 사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그리지 않은 초상화를 보고 더욱 화를 냈다. 이때 마침 이름 없는 한 젊은 화가가 장군 앞에 나타나 자신이 초상화를 그려보겠다고 했다. 장군은 다소 미심쩍은 구석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초상화를 남기고 싶은 마음에 허락했다. 그런데 장군은 이름 없는 젊은 화가가 그린 초상화에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화가는 다른 화가와는 달리 장군의 성한 눈이 있는 옆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다.

사물을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림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사물과 장소를 여러 사람이 카메라로 찍어도 같은 사진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다. 성경 또한 마찬가지다. 성경을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보는 각도만 진리는 아닌 것이다. 내가 그린 예수님만 예수님의 참모습이 아닌 것이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 다르지 않은가?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당신만의 선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우리는 각자에게 계시해주신 만큼만 알고 믿을 때가 많다. 더 겸손하여 어린아이와 같아진다면 더 많은 것을 계시해주실 것이다. 또한 사고의 유연성을 더한다면 더 많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함과 유연한 사고로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에 노력해야 한다.

이안드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