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와 인내

요즘 ‘포기’와 ‘인내’라는 단어가 밀물과 썰물처럼 계속 밀려옵니다. 한쪽에서는 ‘이제는 좀 쉬고 싶어. 조금만 편하게 살고 싶어. 더 이상은 못 넘을 것 같아. 여기까지가 내 한계인가?’ 라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자.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돼. 끝까지 나아가자.’라는 인내의 마음이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어쩌면 거친 들로 이끄시어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앞에 반기를 계속 들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는 모래바람도 싫고, 눈보라도 싫고, 광야가 아닌 따뜻한 온돌방에서 지내고 싶다는 투정만 자꾸 늘어갑니다. 점점 더 엄살쟁이가 되는 듯합니다. 두 마음으로 인해 갈까 말까 망설이는 틈에 나타와 천박의 이끼가 끼어서 자꾸만 정욕의 늪에 미끄러지게 됩니다.

정욕의 늪에 빠져 겨우 목만 내밀고 숨을 헐떡이다 보니, 숨이 차서 장거리 경주가 벅차게 느껴집니다. 단번에 결승점에 도착해서 테이프를 끊고 싶은 유혹이 많습니다. 좀 더 쉬운 방법, 좀 더 편한 환경 속에서 달리고 싶은 마음에 세상의 악세사리들을 주렁주렁 달고 달리다 보니 쉽게 지치는 듯합니다.

어쩌면 (영적) 성도라는 이름이 제 영혼을 지탱해 줄줄 알고 착각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영혼에 비게 살이 끼어 뒤뚱거리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걷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영적인 사람인양 의기양양해 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목회자처럼 정욕의 눈에 가려져 자신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장님이 되어버렸습니다.

40년 광야생활의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점점 더 이름뿐인 성도가 되어 가고 있는 듯합니다. 정욕의 칭칭 휘감겨 한발자국도 떼어놓지 못하고 옛날만 곱씹으며 앉은뱅이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자꾸만 강하게 침투해 오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안일무사, 막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영적태만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철저한 영성훈련과 익은 열매라는 목표가 희미해진 탓입니다. 푯대를 잃어버리고 앞에 것이 아닌 뒤에 것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장사라도 영성훈련이 느슨해지면 영혼은 점점 힘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영성훈련이 약해지면, 고통이 그다지 달갑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길고 긴 광야생활이 무기건조하고 지루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다 보면 애굽에서 즐기던 고기 맛을 자꾸만 찾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민11:5).

무교병, 맑은 물은 지겹다고 투정을 부릴 수 밖에 없습니다. 신나는 거리가 없는 광야가 싫어지기 마련이고 다시 애굽으로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 집니다. 그곳에는 왠지 안락하고 편하고 더 멋진 삶이 펼쳐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영혼을 삼키는 죽음의 바다만 있을 뿐입니다. 잠시 잠깐의 쾌락과 달콤한 유혹을 쫓다가 라오디게아 목회자처럼 가련하고 불쌍한, 쪽박을 차는 거지신세가 되고 맙니다. 끊임없는 영적훈련만이 영혼을 살리는 길이고, 머뭇거리면 마귀에게 목덜미가 잡혀 이리저리 노예처럼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머물 거릴 때가 아닙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평상 밑에서 모래를 만지작거리며 소꿉놀이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영성의 허리띠를 강하게 조여야 할 때입니다. 잠시 잠깐 머물 이 세상, 주님을 위해서 확실하게 몸 바쳐야 할 때입니다. 고통과 역경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세상에 바라볼 때가 아닙니다.

얼마 전, 마음과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겪던 적이 있었습니다. 피로와 두통과 구토증으로 인해 밥을 넘길 수 없었고, 잠을 도저히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연약해진 마음에 앞으로 더 큰 어려움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라는 마귀의 속살거림이 계속 방망이질 쳤습니다. 연이어 더 이상 힘들고 버거운 일을 하고 싶지 않은 독소가 한 방울 뿌려졌습니다. 안일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마음이 깊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더 이상 마음에 꺼려지는 일들, 고달픈 일들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귀의 미끼인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힘들다고 작은 십자가를 하나 내려놓자, 마치 도미노처럼 다른 것까지 줄줄이 놓고 말았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니, 영혼의 힘마저 잃어버리고 오래시간 방황을 하게 되었습니다. 배의 방향키를 놓치고 이곳저곳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포기라는 단어가 계속 맴돌았던 이유도 고통 받기 싫어하는 마음이 가득 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끈기 있게 지고 간다면 그 십자가가 우리를 짊어 가듯, 자신의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진정한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리석게도 주님이 주신 영혼의 묘약, 최근 망치로 이리저리 얻어맞고서야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습니다. 맞아야 정신이 드니 아직도 얼마나 더 많은 망치를 맞아야 할지 두렵기도 하지만, 제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시 일어서렵니다. 아프고 쓰리고 아리더라도 다시 일어서렵니다. 세상의 것으로 위안 받으려는 안일한 생각을 버리고 다시 박차고 일어서렵니다. 주님만을 붙들기 위해 다시 일어서렵니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고통의 신비를 아시는 주님께서 저는 연약하지만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인내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연약한 마음을 접고 이 길을 다시 걷고자 합니다. 아니 다시 뛰고자 합니다. 넘어져 깨지고 피가 나더라도 다시 가렵니다. 가파르고 험준해도 주님의 피 묻은 손을 꼭 붙들고 이 길을 오르렵니다.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문으로 바뀌는 그날까지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다시 혹독한 영성훈련에 돌입하렵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바보 같아 보이고, 뭔가 모자라 보이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손해 보는 것 같을지라도 다시 좁은 문 좁은 길을 달려가렵니다. 심통이를 버리고 다시 주님을 따르는 두통이가 되어보렵니다. 고달파도 힘들어도 도망가지 않고 다시 두통이에 익숙해지렵니다.

로렌스 성인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 받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 고통에 익숙해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허락하시는 모든 것들을 견뎌낼 힘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세상은 이런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를 놀라게 하는 것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가 아니라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처신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질병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육신의 아픔으로만 간주합니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질병이 육신을 힘들게 하고 괴롭힌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고통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이고, 자기들을 올바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실로 진한 달콤함과 위안을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