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있는 자는 들으라

세례 받으러 나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종교 전문가들에게 요한은 지체 없이 폭언을 퍼붓는다. ‘독사의 자식들아!’(마3:7) 질책을 한다. 화인(火印)맞은 얌체 양심으로 뻔뻔하게 몰려온 저들의 외식을 갈기갈기 찢은 것이다. 거룩하신 성자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을 향하여 인자하고 온유하신 품위와는 달리 ‘독사의 새끼들아, 뱀 같은 자들아!’(마12:34) 하시며 회개할 여유까지 이미 포기한 저들에게 천둥소리로 심판을 선언하셨다. 섞인 것이 없는 진품 후레자식(토끼가 여우를 비꼬는 말: 두껍전)들일 것이다.

친히 그의 피로 세워진 소중한 일곱 교회를 상세히 진단하신 우리 주님은 어김없이 마지막 결론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계2:7)로 마감하신다.

이사야 선지자는 미어지는 가슴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전달한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사1:3). “내 종과 같은 소경이 또 있으랴. 내가 보낸 심부름꾼과 같은 귀머거리가 또 있으랴. 나의 사명을 띠고 가는 자와 같은 소경이 또 있으랴. 야훼의 종과 같은 귀머거리가 또 어디 있으랴”(사42:19).

아침마다 경건하신 자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배짱 내밀고 불쾌한 싸움을 지속하는 으뜸 귀머거리가 자기 종들이란 지적이시다. 버나드 쇼가 생전에 자기 묘비명(墓碑銘)으로 말한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를 같이 써야 할 사람들이다. 허탄한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세속적인 귀(딤후4:4), 옛 삶에서 도무지 빠져나오지 못하여 육정에 묶인 할례받지 못한 귀(렘6:10), 영성을 키우는 말씀에는 느리고도 둔한 귀(마13:15), “주께 등을 돌리고 뻣뻣하여 고집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복종하지 않았습니다.”(느9:29) 그대로다. 성경 곳곳에 주님의 탄식이 장엄한 추수의 날까지 지속될 것만 같다. 하나님께서 닦달하시는데도 꼼짝하지 않기로 맹세한 것 같다.

아담아, 탈선했구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똑똑히 들었으면서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물으시며 회복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아담과 그의 핏줄 가인 모두가 잡아떼기로 일관한 것에 대한 살벌한 대가를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목회자에게 ‘만일 돌이키지 않으면 내 입에서 너를 뱉어버리겠노라.’ 하셨다. 땅에 뱉어버린 더러운 침! 맛 잃은 소금처럼 길가에 흩어버려 사람들에게 밟히며 창피스럽게 살아야 하는 기구한 신세, 그러나 이것까지는 참을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날에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라.’는 준엄한 심판주의 말 한 마디에 하염없이 문밖에 서서 이를 갈고 가슴 치며 통곡하는 무궁한 그날을 감히 상상해 보았는가! 당신의 진짜 하나님은 누구신가 묻고 싶다.

“귀를 기울여 내 소리를 들어라 정신 차려 내 말을 들어라.”(사28:23) 하신다. 주님의 음성이 지금 우리 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스스로 농아가 되지 말라. 중요한 것은 복음의 진보이지 영웅적 행동이 아니다. 순종이 제사(예배)보다 급선무란 원칙을 잊으면 ‘지옥불’만이 기다릴 뿐이다. 귀 달렸거든 지금 바로 듣고 돌이켜야 한다는 주님의 간절한 음성을 묵살치 말아야 한다.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