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포기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상

우리 삶 속에서 고통은 결코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을 통해 우리의 죄가 사해졌기 때문입니다. 고통, 아픔, 슬픔, 모멸, 외로움 등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입맞춤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항상 부활의 기쁨으로 끝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꼈을 때, 이제 다가올 부활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것도 당신을 슬픔으로 채우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잊어버릴 만큼 큰 슬픔이 당신의 마음을 결코 채우지 않게 하십시오.

에이즈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집이 뉴욕에 있습니다. 나는 성탄 전야에 예수님의 생일선물로, 감옥에서 죽고 싶지 않은 죄수 네 명과 에이즈 환자와 함께 이 집을 시작했습니다. 작은 기도소를 만들어 한 번도 예수님께 가까이 가보지 않았던 젊은이들이 원한다면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언젠가 한 사람이 내게 말했습니다. “그 동안 저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올 때면 나는 예수그리스도가 가시관을 썼을 때 느꼈던 그 고통과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등에 무서운 통증을 느낄 때는 채찍으로 맞은 예수님의 고통과 비교했습니다. 손발에 무서운 통증을 느꼈을 때는 병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의 예수님의 고통과 비교했습니다. 이제 나를 집으로 데려가 주시라고 청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를 기도소로 데려갔습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 젊은이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말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그 사이에는 놀라운 이해로 넘치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흘 후에 죽었습니다. 젊은이가 체험한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아마 사랑이었고,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성스러운 존재입니다. 그 때문에 누군가가 죽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우리 모두가 가도록 예정된 곳입니다.

공부하기 위해 파견된 우리 수녀 중 한 사람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학위를 받는 날 그녀가 죽은 것이었습니다. 죽어가면서 그녀가 내게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빨리 예수님이 저를 부르시죠?” 나는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녀님의 일이 아니라 수녀님을 원하십니다.” 그녀는 행복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죽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의 양으로 판단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쏟았던 사랑의 무게로 판단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자기희생으로부터, 즉 아픔을 느낄 정도로 큰 희생에서 흘러나옵니다. 이렇듯 죽음은 가장 쉽고 가장 빨리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입니다.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그 사실을 이해시킬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가장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평화롭게 죽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대관식과 같습니다. 죽음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향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죽은 사람에 대해 그리워하고 서운해 하겠지만 하나님 안에서 죽음을 맞는 사람은 아름다운 집, 바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고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