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


하나님께 더 나가기를 원하는 영혼마다 부르짖는 공통의 절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아라비아 광야에서 부르짖었던 사도 바울의 절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절규이고, 하나님을 향한 성숙한 영혼들의 진솔한 고백이기도 하다. 수많은 영성의 사람들은 바울처럼 그렇게 로마서 7장의 탄식을 하였다.

오래전 똑같은 고민을 가지고 탄식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클리마쿠스다. 그는 인간이 육신을 가지고 살면서 영성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오는 갈등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나의 이 육신을 어떤 규범으로 묶어 놓을 수 있겠는가? 내가 그를 묶기도 전에 그는 벌써 풀려나고, 그를 벌 주기 전에 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미안해한다. 나의 본성이 그를 사랑하게 되어 있는데 그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영원토록 그에게 매여 있는데 어떻게 그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겠는가? 그는 나와 함께 일어나는데 내가 어떻게 그로부터 도망할 수 있겠는가? 그는 부패한 근성을 받았는데 내가 어떻게 그를 정결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그가 옳은 논쟁은 다 가지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를 상대로 논쟁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는 나의 친구가 되고 또한 적이 되는가?”

시내 광야에서 절규하는 클리마쿠스의 이 소리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절규했던 사도 바울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절규와 고민에 끝나지 않고 그 고민에서 탈피하기 위한 싸움을 하였다. 클리마쿠스는 그러나 너와 싸우기로 나는 결심을 했다. 나는 너를 정복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훈련을 가졌다.

6세기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16세에 수도원에 들어가 압바 마르티루스(Abba Martyrius)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마르티루스가 죽자, 그는 시나이 산기슭에서 약 5마일 떨어진 톨라스(Tholas)로 가서 40년 동안 독거(solitude)하며 금욕주의적 삶을 살았다. 그후에 클리마쿠스는 시나이 수도원의 원장이 되어 지내는 동안에 인근의 라이투 요한(John of Raithu) 수도원장의 요청으로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시나이의 요한혹은 사다리(klimakis)의 요한이라 부르다가 후에 요한 클리마쿠스가 되었다. 하나님에게 오르는 사다리는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30개의 가로대 혹은 계단을 말한다. 그는 이 30개의 계단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것은 세상과의 절교, 근본덕행, 욕정과의 싸움, 수행생활의 완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일치다.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The Ladder of Divine Ascent)”는 정교회 전통 사제들과 수도사들과 신실한 신앙인들이 일생에 40~50회 이상 읽는다고 한다. 서방교회에 천로역정이 있다면 동방정교회에는 사다리가 있다.

그의 첫 사다리는 세상에 대한 포기라는 것이다. 이는 세상과의 절교다. 모든 수도자들이야 당연히 세상적인 의무와 권리를 포기하고 살아가지만 여전히 두 발을 세상에 딛고 살아가는 세속의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포기에 대해서 클리마쿠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선을 행하라. 악으로 말하지 말라. 남의 것을 빼앗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남을 경멸하거나 미워하지 말라. 교회의 모임에서 자신을 분리하지 말라. 불쌍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라. 다른 이의 침소를 범하지 말라. 자신의 아내가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하라. 이것을 행하면 천국에서 멀지 않느니라.”

그것은 바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먼저 세상 것을 버리는 것은 곧 주님의 계명 앞에 살아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것처럼 속인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고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포기는 오직 말씀대로 살기를 결단하고 그 길로 나가는 것이다.

세상의 포기라는 것은 또한 이전 것의 포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했다면 반드시 새 출발이 이루어진다. 자신의 손에 있던 사과 한 조각보다 더 좋은 과일이 생겼다면, 그것을 놓아야 더 좋은 과일을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새로운 가치를 만났다면 이전 것을 놓아야만 한다. 그것이 세상의 포기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4-26) 하였고, 사도 바울도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가치와 눈이 열리면 새로운 출발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그러나 사단은 여전히 세상의 것이 더 가치 있다고 계속 우리에게 유혹해 온다. 그러므로 모든 포기와 결별과 이탈을 통해 떠나는 이들이 반드시 더 높은 사다리로 오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현재의 모습에서 더 좋은 삶과 존재로 빚어지기 원한다면 클리마쿠스와 같은 결단을 매 순간마다 해야만 하겠다.

오래전 그의 권면이 오늘도 우리의 귀에 들리는 듯하다. “형제들이여, 열심히 사다리를 올라가십시오. 올라가기로 결심하십시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는 분의 전에 이르자라는 말을 경청하십시오.”

이안드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