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질병

독일의 신학자 요르그 징크(Joerg Zink)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현대인을 진단하였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였다. 그는 많은 장비를 준비하였고 무엇보다 중요한 식수를 준비했다. 그러나 길을 떠난 지 하루 만에 식수가 바닥이 나버렸다. 그는 기진하여 쓰러졌고 마침내 실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참 후 그가 눈을 떠보니 눈앞에 야자수가 보였고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이제 죽을 때가 되어 환각이 보이는구나 하고 애써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귓가에 물소리와 새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 이제 정말 내가 죽게 되는구나, 하고 또다시 소리에 귀를 닫았다. 그 이튿날 아침, 사막의 베두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오아시스에 물을 길으러 나왔다가 물가에서 입술이 타들어가 죽은 청년을 발견하게 된다. 그 모습에 너무도 이상했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 이 사람은 왜 물가에서 목말라 죽었을까요?” 그러자 아버지가 대답한다. “얘야, 여기 죽어 있는 젊은이가 바로 현대인이란다.”

물을 두고 목말라 죽어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의 비유는 현대인을 가장 잘 표현한 이야기다. 부족할 것 없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대단히 큰 환경 하나가 있는데, 바로 풍족함이다. 지구 저편 아프리카 아이들이나 북한의 아이들이 굶어 죽는다는 소식을 듣는 오늘도, 먹을 것이 많고, 입고, 보고, 들을 것들이 넘쳐 난다. 즐기고 누릴 것들, 소유하고 싶은 것들이 넘쳐서 흘러내리는 현실이다. 결국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많은 것들을 곁에 두고 다 누리거나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갈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질병이나 죽음을 위해 보험을 들고, 저축을 하면서 그 언젠가 때문에 오늘 근심하고 불안하고 염려하고 있다.

청소년들도, 청년들도, 기성세대들도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해하고, 준비되지 않은 것 같으면 오늘을 힘겨워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지금 곁에 있는 충분한 것들을 부족해하며,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로 고단한 하루를 사는 것이 우리 현대인들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은 현대인의 삶과 많이 닮았다. 과거로 인한 우울함, 의미 없는 현재,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으로 피곤하고 지쳐버린 현대인의 모습을 다 담고 있다. 눈앞에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보고도 목말라하였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내게 생수(生水)를 구하였을 것이다.’

행복의 조건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을 다섯 가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기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끼는 외모. 둘째, 힘겨루기에서 하나는 이기고 둘은 질 정도로만 갖추고 있는 체력. 셋째, 먹고 입고 살기에는 약간 부족한 듯한 재산. 넷째,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절반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다섯째, 여러 사람 앞에서 연설을 한다면 반 밖에 박수를 받지 못하는 말솜씨라고 했다.

외모지상주의 세상에서 조금 부족하다고 느끼는 외모. 건강이 우선이어서 너도 나도 웰빙을 외치는 세상에서 나약한 체력. 물질만능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족한 재산. 명예 하나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말만 잘하면 그래도 살아 갈 수 있다고 하는 세상에서 박수 받지 못하는 말솜씨를 가졌다면, 행복하긴 틀린 것 같은데 행복의 조건이라고 하는 이유가 뭘까.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에서 초점은 조금 부족함이다.

뭐든 완벽하지 않다. 부족한데, 조금씩 부족하다. 인간의 속성을 이해한 논리 같아 공감이 간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너무 잘 아셔서 조금 부족한 것들을 주시며 채워가게 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은 많이 부족하면 불평을 하는 못된 습성이 있다. 조금 부족하면 인내하며 견뎌보기도 하지만, 정말 부족하다 싶어 감당하기가 어려워지면 의욕을 잃기도 하고 불평과 원망을 하다 포기하기도 한다. 뭔가 만족스럽게 채워지지 않아도 조금이면 그래도 견뎌보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만 주시고 감당치 못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시어 쓰러지지 않게 하신다. 갈대를 꺾어 버리거나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남겨두신 조금으로 결국 회복케 하신다. 속죄은총을 베풀어 주실 때에도, 천국을 가게 하시는 광야여정에서도, 나약하고 어리석고 자주 배신하는 죄의 성질을 가진 인간을 위해 배려하시고 용서하시고 힘을 주신다. 끝까지 사랑하신다. 주님은 우리를 조금, 부족하게 하신다. 욕심 많은 우리의 눈으로 볼 때 많은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실상은 조금 부족한 경우가 허다하다.

주님은 한 달란트도 없이 맨손으로 일을 시키거나, 피할 길도 없이 광야로 내몰지 않으신다. 기다리지도, 예고하지도 않은 채 하나님의 어떤 일을 하지 않으신다. 기도하면 알게 하시고, 성경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고, 주의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여 주시기도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너무 많은 특혜를 받고 산다. 너무도 친절하고 철두철미하게 세상을 주관하시고 역사를 운행하시면서도 인간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해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안에 평안히 살면서, “저는 부족해요. 그래서 행복하지 않아요.” 라며 감히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는 것은 실로 교만하고 부끄러운 배은망덕한 일이다. 기뻐하며 감사치 못하는 이유가 조금 부족한 것들 때문이라니. 행복을 위해 필요 충분한 조건을 너무 많이 받아 누리면서 조금 부족한 것들 때문에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하나님의 부족함

약한 자들을 들어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부족함에서 출발하신다. 우리 삶에 넘치는 조건만 있다면 우리는 매우 불행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 남에게 자비롭지 못하고, 교만하거나 아집적인 모습으로 사는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 믿음보다는 보이는 현실에 급급하고 만족하며 내세를 소망하는 마음도 적을 것이다.

조금 부족한 것들이 있어야, 사도바울과 같이 단련된 자족을 배우고, 욥과 같이 넘치는 축복 속에 살다가 조금이 아니라 다 무너지는 실패 속에서도 주신이도 거두시는 이도 주님이심을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 부족해야 주님을 찾을 수 있으니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부족한 것들을 주신 것이고, 그것은 사랑의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부족함으로 점철된 내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 말고는 답이 없다. 부족한 인격, 오래 되어도 고쳐지지 못하는 결점과 실수, 판단과 정죄에 익숙한 언어생활, 좁은 마음, 부족한 경건의 능력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부족함들이 내 삶에 포진되어 있다. 하나님 말고는 그 어떤 대안도 없는 를 철저하게 발견하게 된다.

조금 부족한 것들을 통해 때론 크게 고통하게도 하시고, 맘고생을 많이 하면서 울게도 하시지만, 그것 때문에 결국은 인격의 변화를 이루고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짐을 경험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행복은, 돈도 명예도 인기도 그 무엇도 아닌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이다. 그것이 이루어 질 때, 세상을 향해 외치고 전하는 담대함이 나타나는 것이다.

거룩으로 가는 과정은 늘 부족함에서 출발한다. 나는 원래부터 불완전하고 부족하게 창조된 피조물인데, 그 부족함을 채워주시려고 주님이 손을 내미시니 이보다 큰 은혜와 행복이 어디 있을까. 조금 부족하게 하시면서 많은 영적 풍요를 주시니 감사치 않을 수 없다.

만족을 모른 채 더 움켜쥐고, 채우고, 즐기고 싶은 세대. 조금 더 많이 누리는 것이 자랑이고 기쁨인 세대에서, 조금 부족하게 하시는 은총을 받은 자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조금 부족한 것은, 채우실 주님의 자리다. 채워주시면 또 기뻐하면서 전하는 자리이다. 천국 가는 그날까지, 우리 앞에 놓인 조금 부족한 것들은, 때를 따라 채우시고 새롭게 하시며 유익하게 하실 행복한 주님의 자리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