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살라

3년 전 주일학교를 맡을 당시 학생은 단 한 명이었다. 20년 넘게 어린이사역을 해왔지만, 마음에 부담감이 컸다. 숱한 마음의 갈등을 겪으면서 1년 넘게 아파트, 놀이터, 학교 운동장 등을 다니면서 노트에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하면서 전도하였다. 마음이 서서히 지쳐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몇 명의 아이들을 붙여주셨다. 엄마의 반대가 심했지만, 매주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그렇게 하면서 아이들이 하나둘 정착되어갔다. 혹 친척 집에 가서 오전예배를 빠질 경우 집에도 가지 않고, 먼저 교회로 헐레벌떡 아이들이 뛰어왔다. 주일학교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가는 듯했고, 이제는 어린이사역을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난 12월 어린이 초청파티를 기점으로 마무리를 하려고 하였다. ‘이제 좀 되었으니 내려놓아도 되겠지.’라는 생각을 할 즈음, 아이들이 갑자기 우수수 떨어져나갔다. 정말 순식간에 다시 원점이 되고 말았다. 이래저래 마음이 답답했다. ‘하나님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라고요. 정말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진퇴양난이었다. 마음도 번데기마냥 위축되었다. 뚫고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마음의 부대낌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나를 잘 아시는 주님께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10:35-36)는 성경구절을 올해 내게 주셨다. 고통이 오면 줄행랑을 치고 도망가기 바쁜 나를 정확히 꿰뚫어 보시는 듯해서 가슴이 뜨끔했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주님 앞에 서 있다.

어린 시절 난 제법 고통을 잘 참고 인내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이비인후과에 축농증 치료를 받으러 자주 갔었다. 코를 자주 풀다보니 귀에까지 영향을 미쳐 중이염으로 막힌 귀를 뚫어야 했기 때문이다. 의사선생님이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며 치료를 하거나, 기다란 코 세척 기구를 코에서 목까지 집어넣을 때는 정말 두렵고 떨렸다. 특히 귀를 치료할 경우 마취를 하지 않고 칼로 염증을 긁어내는 수술을 몇 번이나 받았는데, 그때마다 너무 긴장이 되어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곤 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의사선생님이 많이 아플 텐데, 아이가 고통을 잘 참네.”라면서 기특하다며 칭찬을 자주 해주셨다. 은연중에 나는 그래도 고통을 잘 참고 잘 인내하는 편이야.’라는 생각이 그때부터 마음 한 켠에 자리잡았다. 어른이 된 후 진짜 고통을 잘 참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비로소 나의 실상을 바로 보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난이나 고통이 다가올 때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이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5:3-4, 쉬운성경).

인내를 뜻하는 영어 단어 ‘patience’고통 받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왔다고 한다. 인내는 고통 속에서 자라며,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 예수님처럼 고통 속에서 소망을 간직하고 인내를 배움으로 상 받는 자가 되는 것, 그것이 인내의 중요한 가치다. 고통을 피하기만 해서는 결코 영혼의 성장이 이루어질 수 없는데, 고통이 닥쳐오면 원망불평부터 먼저 하게 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며 도망칠 궁리부터 한다. 우리의 자아는 항상 고통을 과장하여 실제보다 더 크게 생각되게 하여 염려와 불안에 떨게 한다.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또 다른 축복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적인 결점이나 실패로부터 오는 정신적인 고통이나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들이 닥쳐올 때, 그것에만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우리는 고통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나님께서는 엄살하는 사람이나 꾀병하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이를테면 조금 괴롭다고 해서 조금 고난의 가시밭길이라 해서 쉽게 팽개치고 뺑소니하려고 하는 사람 있지요. 참을 수 있는 만큼 끝까지 참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우면 기적을 구해가면서 어려움을 피하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기적을 구하기보다 오히려 끝까지 참을 수 있을 만큼 참다가 기적 나타내기를 좋아하십니다. 우리생활 가운데 십자가가 크고 작게 나타나잖아요.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처음 짊어질 때는 좀 어려운 듯이 보이지만, 나중에는 그 십자가가 오히려 우리를 짊어지고 가게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무수한 기적과 신비로 우리의 모든 시험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에 결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고통 앞에서 뒤로 피하고 뺑소니하려고 하고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깊은 신앙체험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험들이 닥쳐올 때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서 앞으로만 탱크처럼 돌진하게 되면 기적은 언제나 따라옵니다.”

믿음의 스승님의 교훈이다. 어떤 고통이 따를지라도 피할 길을 달라고 하지 않으시고 좁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시는 삶. 단 한 번도 십자가를 피하거나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으셨던 삶. 그 어떤 손해와 희생과 고통과 큰 십자가가 주어질지라도 연단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셨던 그 거룩한 삶이, 작은 고통 앞에서도 인내하지 못하고 도망칠 궁리만 하는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한다.

좁은 길을 걷다가 조금만 힘들어도 넓은 길을 기웃거리며 내 몫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내려놓으려고 하던 때를 기억하며 회개한다. 고통 앞에 뒤로 물러서서 침륜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순간들을 성찰한다. 실패와 마음의 부대낌이 싫어서 자꾸만 십자가를 내려놓고 도망치려하던 순간이 참 많았었다. 그러나 도망칠 수는 없기에 가만히 앉은 채 하나님의 기적만을 구하며 쉽게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였다. 고통이 싫고,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인내가 싫어서였다. 마음이 냉랭해지고 철저히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굳은 의지가 약해지자, 좀더 편하고 쉬운 길로 가고 싶은 충동이 내 안에 계속 요동쳤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고통으로부터 면제받는 것을 포기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의 길을 선택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기 위해 광야 길을 걷는 우리는 날마다 인내의 꽃을 피우는 중이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앞에 당하는 고통의 위험을 감수하며 몸을 찌르는 가시를 이겨내고, 메마른 사막 같은 광야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오늘도 인내라는 구원의 꽃을 피워내고 있다. 그 나그네들의 이름이 그리스도인들, 즉 예수님의 사람들이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라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욥. 나의 십자가는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주님이 주신 옷이다. 그것으로 하늘의 상이 주어질 것이며, 마침내 천국에서 영원한 꽃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주님을 위해 온 몸을 태운 거룩한 불꽃으로.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