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매우 다양하게 우리 각각을 위한 십자가를 만드십니다. 어떤 이를 위해서는 눌릴 만한 납과 철로 된 십자가를 만드시고, 어떤 이를 위해서는 보기에는 너무 가벼운 지푸라기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지면 무거운 십자가를 만드십니다. 또 다른 이에게는 세상의 부러움을 살 만큼 휘황찬란한 금과 보석의 십자가를 지우시지만, 이런 십자가 역시 멸시 천대를 받는 십자가와 동일한 고난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지만 결국에는 쓰라림으로 변할 것들로 십자가를 만드십니다. 높은 지위에는 압박과 괴로움이 뒤따릅니다. 우리가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것들을 주는 대신에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을 가져가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을 양식이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 부유한 자의 잔과 매우 비슷한 고난을 섞어 그 가난 속에서 납으로 만든 십자가를 발견하게 하십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이 먹을 양식에 배고픈 것만큼이나 자유로움과 여유에 목말라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아무 문이나 두드리거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구걸할 수 있는 것과 달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동정이나 위안 구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지위로 정신적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육체적 연약함까지 더하시곤 합니다. 이 두 가지 십자가를 조화시켜 놓은 것만큼 유익한 것도 없습니다. 이는 사람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못 박고, 자기 능력의 부족함과 그 소유의 헛됨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위치에 따라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실제로 불행함이 없는 화려함 속에서도 쓴잔을 마시게 되며, 왕의 상을 장식하는 금잔에서조차 가장 쓴 찌꺼기가 있게 마련입니다. 주님은 포장된 무력함에 불과한 인간의 위대함을 깨뜨리기를 기뻐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였듯이, 이와 같은 마음의 비추심을 받고 이를 구하는 자들은 행복합니다. 높은 지위에서 겪는 시험은 류머티즘이나 두통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며, 이 모든 것이 단지 속박에 불과할 뿐임을 가르쳐줍니다. 인내함으로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더 실제적인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부유함의 단 한 가지 유익은 세상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높은 지위 자체는 인간을 고통에서 구해주지 못합니다. 높은 지위에는 그만한 시험이 있을 뿐 아니라, 낮은 곳에 있는 자들에게 있는 위안조차 구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높은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적어도 아플 때는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외부의 방해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명한 사람은 그 모든 십자가를 자신이 져야 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편안하게 지낼 시간에 여전히 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세상이 선망하는 것들을 근심과 수고함으로 만드시고, 땅의 위대함을 다른 이들을 위한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화려한 세상적인 부요함 아래에 십자가를 숨기심으로써 십자가를 온전케 하시고, 이것을 통해 부유함이 얼마나 가치가 없는 것인지를 나타내십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자비로 나를 다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세상은 낙원으로 보지만, 그 안에 있는 고난을 볼 줄 아는 것은 실로 복된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거짓 낙원을 구하다가 이 짧은 삶 이후의 진정한 낙원에 대한 소망을 빼앗기곤 합니다. 겉으로는 위대한 부요함 안에 감춰진 진정한 보화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여, 거룩한 십자가여! 

나로 네게 합일케 하라! 

십자가에 달리신 나의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과 함께 죄와 세상에 대해 영원히 죽으리! 아멘.


「십자가의 왕도」 중에서, 프랑소와 페늘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