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위로의 하나님
 요즘 우리나라와 사회는 심한 스트레스 위에 서 있다. 저마다 처한 어려움에 사회적 갈등까지 더해져 스트레스가 더 심화된다고 볼 수 있다. 몇 달간 지속된 바이러스로 인해 생겨난 코로나 블루라는 우울증이 생겨나기도 하고, 국가적 선거를 마친 뒤 양극화된 사회정치적 대치 상황도 보고 있다. 신앙인들도 몇 주간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지 못해 영적 갈함을 호소한다. 어떤 이들은 생계의 고통을, 어떤 이들은 막연한 답답함과 두려움, 불안을, 학생들과 부모들은 온라인으로 교육 시스템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서 탄성을 자아낸다. 누군가를 막론하고 모두가 지쳐있다.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으며 상처 입은 자들로 살아가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을 단번에 해결하고 정리해 줄 누군가가 나타나길 바라는 이들도 있다.
 
우리를 숨 쉬게 하시나니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내신 수많은 선지자들의 ‘회개하고 속히 돌아오라’는 명에도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길로 치달았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이란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망하기까지 이르고 만다. 나라는 바벨론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왕족과 귀족, 인재들은 포로로 끌려간다. 나라를 잃고 포로 생활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다. 날마다 슬픈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을 찾는다. 그들의 탄식을 들으신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히브리어로 ‘위로’가 ‘다시 숨을 쉬게 한다’는 뜻이다. 죄악으로 숨이 막혀 죽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시 숨을 쉬게 하는 것이 ‘위로’가 갖는 뜻이다. 성령을 헬라어로 ‘파라클레이토스’라고 하는데 ‘위로자’란 뜻이다. 위로자 성령님 하나님이 인간을 다시 숨 쉬게 하시니 이 얼마나 거룩한 긍휼의 은혜인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위로자 성령 하나님은, 상한 마음을 만져주시고, 삶의 아픔을 치료하시며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심을 살아가는 순간순간 느끼고 경험한다. 더 나은 것을 주시길 원하셔서 우리 심령을 깨우시고 양심을 밝혀주신다.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으로만 채워지길 바라셔서 소망으로 기대하시고 새 힘을 불어 넣어 주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하나님을 가리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위로의 하나님께서 온갖 고난을 겪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니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은 풍성한 은혜와 신실한 사랑 안에 거하는 복된 영혼들이다.


참 스승의 길
개인이나 사회가 길을 잃고 헤맬 때 이끌어주고 길을 밝혀줄 스승이나 멘토를 갈망하는 것은 인지상정의 마음이다. 성경의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고 지금 우리들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구약성경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신약성경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 했다. 즉 하나님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확증한 것이다. 또한 ‘자비의 아버지’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도 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헌신하며 당한 수많은 고난과 죽음 같은 시련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음을 성경은 증명한다. 그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은 언제나 위로자요 자비의 하나님이셨다. 고난당함을 위로하셨고 위기 때 마다 구해 주셨다. 신비한 일은 고난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매순간 경험한 바울이,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자요 길을 밝혀주는 스승이요 기쁨의 메신저가 되어갔다는 사실이다.
내가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을, 자신의 몸에 삶으로 투영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고난을 통과한 바울을 만나는 사람들은 그들 통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그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 죽고 싶은 이들이 살 소망이 생겼고, 맘대로 살던 이들이 복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길 결단하였다.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나누어 주길 원하신다. 소망 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약속의 말씀을 전하길 원하신다. 말씀이 위로가 되어 그 삶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가 나타나 우리 삶을 개혁해 주길 기대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참 스승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참 스승이 되어야 하는 시간이 왔다. 누군가에게 스승이 되라고 떠밀지 말고 내가 주님의 위로를 전하는 메신저, 참 선생(先生)으로 익어가야 한다. 우리의 사명이다.
청년부 예배 때 우리 교회 청년들이 최근 벌어진 사회적 거리두기와 신앙의 문제들을 가지고 토론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교회들이 예배를 쉬는 것을 보면서 많은 고민이 되었다는 것이다. 국가적 사태니 협조가 필요함을 인지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핑계 삼아 신앙이 나태해지고 게을러지는 것을 보며 여러 생각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들을 했다.
결국 신앙의 문제는 잠시만 머뭇거려도 영광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앞으로 지금보다 더한 상황이 닥칠 것은 분명한데, 조금 앞서가는 이들이 자녀들이나 젊은이들에게 어떤 신앙을 물려주고 보여줄 것인가는 절실한 문제다. 나도 목회자로서도 생각이 깊어지는 날들이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나아갔지만, 현실적 상황 앞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많은 이들, 특히 젊은이들을 보면서 여러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 단단해져야 한다는 결단을 하였다. 아이들의 단계나 청년들의 단계를 넘어서서 아비들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내 삶에 거울이 되셨던 말씀에 따라,  영적인 교훈들이 이제 내 삶이 되어야 하고, 나도 누군가의 영적인 스승이 되어야만 한다. 그 사명을 위해 부르심을 입고 좁은 길을 달려가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날의 영광을 기다리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온갖 고난을 겪되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사도 바울을 위로하셨고 그를 위대한 위로자로 다시 세우셨다면, 우리의 어떤 고난도 역경도 위로 해 주실 수 있다. 삶의 고비마다 우리가 붙는 주님의 손은 권능의 손이요 영광의 손이다. 지금 그날을 위해 위로자 주님을 더욱 붙잡고 간절히 갈망하며 사랑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세계적인 상담자 폴 투르니에 박사는 아내를 사별하고 난 후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슬픕니다. 그러나 나는 아주 행복합니다. 아내가 있을 때는 나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을 거르는 때도 있었지만, 아내가 떠난 다음에 내 마음에 빈 공간이 생기자 나는 매일같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눕니다. 그래서 내 마음은 행복합니다.”
무엇이 비워졌다면 그 자리는 예수님으로 더 채 울 수 있다. 그것이 기독교의 은총이다. 비움이 비움으로 끝나지 않고 거룩한 것을 채우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고난이 멈추지 않고 계속 된다면, 하나님께서 큰 배를 띄우시기 위해 계속 물을 저장하고 있는 중이니 받아들이라는 말이 있다. 큰 배가 뜰만큼 물이 깊어지면, 고난이 멈추고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그 날을 기다리며, 우리의 삶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고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비의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가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그분은 온갖 고난을 겪는 우리를 위로해 주셨고,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는 위로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위로 할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일들과 넘치도록 가득한 위로의 기억들을 우리는 천국에 이르기까지 잊지 못한다. 그래서 제자 된 길을 더 기쁨으로 가야 한다. 우리가 받은 사랑, 긍휼의 순간들, 위로의 경험들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 가는 길만 비추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누군가의 길을 생명 다해 비추셨던 우리들의 왕 예수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