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나 한 수녀님의 고백에 마음속 깊이 공감하였다. “제가 처음에 수녀원에 왔을 때, 만약 제가 사막 한가운데서 시든 사과와 싱싱한 사과를 가지고 있다면 두 개 다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살아보니, 시든 사과는 제가 먹고 맛있는 사과는 상대방을 주겠더군요. 조금 더 살아보니, 맛있는 사과는 내가 먹고, 시든 사과를 남 주겠더라고요. 또 조금 더 살아보니, 저란 사람은 두 개의 사과를 모두 다 먹어버릴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부모님의 목회로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자란 나는 어른들의 말씀에 곧잘 순종했다. 어른들은 그런 나에게 ‘박천사’라는 별명을 붙여주시며 예뻐해 주셨다. 학교라는 사회 안에서도 나는 사람들이 붙여주는 별명으로 나의 존재를 확인하곤 했다. 그 별명이 결코 싫지 않았기에 그 평가를 유지하기 위해 꽤 애쓰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길을 가면서부터 꽤 혼란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했다. 과거에 사람들에게 보였던 나,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나의 모습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꽤 괜찮은 사람, 쓸모 있는 사람으로 보였던 내 뒤에는 온갖 교만과 질투와 거짓과 욕심으로 가득 찬 괴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20여년 동안 잠복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괴물은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을 드러내 당혹스럽게 했다. 가끔씩은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어 큰 절망을 안겨주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 괴물이 ‘진짜 나’였다. 사람들이 붙여주는 별명으로 만들어진 나는 가짜였고 연극이었던 것이다. 이런 ‘진짜 나’와 마주하는 과정 속에서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수치심을 느끼기도 하고, 회개할 용기조차도 나지 않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깊은 절망 속에서 주님은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게 하셨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봤던 십자가인데, 밥 먹을 때마다 감사했던 보혈의 은총인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저릿해오는 이 전율은, 이 간절함은 분명 새로웠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괴물 같은 진짜 나를 위해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려주신 사랑에 목이 멨다(롬5:8). 정말 그랬다. 나의 진짜 모습을 마주한 뒤, 나는 분명 이전보다 예수님과 가까워져 있었다. 구제불능 죄인임을 깨닫는 순간, 예수님의 사랑의 물결이 나를 덮치고 있음을 보았다. 은혜가 당신의 삶에 임하는 방식도 정확히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감싸고 있던 외적인 것을 빼앗아 가신다. 그분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성품의 근원을 강하게 만드시기 위해서다.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자아에 대한 절대적 포기와 멸시가 일어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 내면의 인격은 성장한다. 내 영 아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가장 고결한 작업이 쉼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영적인 겨울이 찾아올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생명은 계속 그 자리에 있다. 겨울이 와도 말이다.” 아직 나의 영적인 겨울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떨어뜨려야 할 외적 추한 잎사귀들이 더 남았는지도 모른다. 지금보다도 더 처절하고 말라비틀어진 내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겁나지 않는다. 분명 나는 다시 세워지고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서게 될 나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