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마음
얼마 전,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밤에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늦은 밤에 웬 전화인가 싶어서 봤더니 멀리 캄보디아에 선교사로 계신 아버지로부터 온 전화다. “하영아, 아빠가 기도하다가 사과할 것이 생각나서 전화했다. 고등학생 때 네가 집에 두고 간 물건이 있어서 갖다 주러 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 성격이 덜렁대서 자주 물건을 두고 다니는 네게 순간 짜증이 나 복도에서 이름을 크게 불렀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생각이 나게 하시는구나. 그땐 아빠가 정말 미안했다.” 갑자기 밤에 전화하셔서 오래전 일을 사과하시는 아버지가 낯설어 알았다며 대충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한동안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져 마음이 찡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목회자셨다. 나에게 아버지는 가정에서보다 강단 위에서 예배를 인도하시는 모습이 더 익숙하다. 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을 강조하셨다. 공부보다 세상일보다 예배가 먼저이며 하나님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은 잠깐이고 천국은 영원하니 이 땅에서 잠깐 행복하려고 하지 말고 영원한 천국에 상급을 쌓으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좀 특이한 것이 같은 말씀을 자주 하신다. 강단에서는 성도들에게, 가정에서는 자녀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반복하는 재주가 있으시다. 내게는 이런 말을 어릴 때부터 자주 하셨다. “결혼을 하는 것보다 안하는 것이 더 좋으니 너는 결혼을 하지 말고 주님만을 위해 살아라.” 그럴 때면 나는 ‘아버지는 결혼을 하셨는데 내게는 왜 하지 말라고 하시냐.’며 입을 삐쭉댔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랑곳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며 인간의 기본 권리인 결혼까지도 주님을 위해 포기한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인 줄 아느냐? 그러니 너는 크면 꼭 개신교 수도원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항상 하시는 말씀이라 나는 그러실 때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곤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정말 아버지의 말씀대로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홀연히 캄보디아 선교사로 떠난 지 몇 달 후 내가 개신교 수도원에 입회하던 날 아버지는 편지를 한 통 보내셨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길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네가 아버지는 한없이 자랑스럽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수도원에 들어가게 해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이제 남은 기도제목은 자녀들이 교회시대 수많은 성인(聖人)들이 받았던 성결의 은총을 받는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끔 전화해서 수도생활이 힘들다고 투정부리면 지금도 어렸을 때부터 항상 하시던 그 말씀, 그리고 입회식 때 보낸 편지와 동일한 내용으로 한결같이 권면하신다. 그러면서 과자나 과일을 한 박스 보내주시며 오늘도 네가 성녀가 되기를 기도한다고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왜 강단에서나, 가정에서나 늘 같은 말씀을 반복해서 하시는지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저 지겹고 잔소리 같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 반복 속에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와 소망이 담겨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는 분이심을 알기에 오늘도 아버지는 같은 말로 권면하고 또 기도하는 것이다.


육신의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때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떠올려보게 된다. 생각해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내 인생에 동일한 말씀을 하고 계신다.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한다. 내 아들을 내어 줄 정도로. 그러니 너는 나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거라.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 말씀을 긴 세월 동안 때론 따뜻한 위로와 사랑으로, 때론 혹독한 매를 들어서 말씀하고 계시다.


육신의 아버지가 장문의 편지를 보내 권면하는 것처럼, 하늘의 아버지도 내게 끊임없이 말을 거신다. 주변 사람을 통해, 상황과 환경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의 편지인 기록된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늘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 같고, 내 마음을 몰라주시고 너무 수준 높은 것만 요구하시는 것 같아 섭섭하기도 하다. 그럴 때면 내게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신다. 자녀에게 최고의 것을 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간절한 바람을 느낄 때면 그 사랑에 다시금 항복하게 된다.


올해 내 나이도 벌써 서른셋이다. 한마디로 철들 나이다. 이젠 나도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자녀가 되고 싶다. 오늘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실 나의 아버지.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나를 사랑하시기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위해서 말이다.

박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