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희를 굽어 보소서

입으려고 하는데 실이 닳아서 단추가 떨어졌다. 저녁시간에 떨어진 단추를 다는데, 다른 단추도 헐렁헐렁하다. 그동안 색도 바라고 소매도 닳아서 여기저기 손을 봐야할 같다. 20여년 입은 옷이 낡아서 그런지 몸이 늙어서 그런지 헐렁헐렁하다. 바늘귀에 실을 꿰는데 끼워지질 않는다. 안경을 벗고 번을 다시 시도해 봐도 계속 빗나갈 뿐이다. 결국은 옆에 미색 실이 끼워져 있는 바늘로 단추를 달았다. 감색 수도복에 미색 실로 하니 이상하다. 그래도 없다. 단추 실도 오래 되니까 닳아서 저절로 떨어지건만, 안에 있는 정욕과 죄의 줄은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지.

닳아서 떨어질 만도 한데 질기고 질긴 정욕의 줄이다. 밤낮 울고불고 눈물콧물 흘리며 “주님, 어떻게 해결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데도 죄의 줄은 도대체 얼마나 질긴지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오히려 정욕의 줄은 칭칭 몸을 얽어매는 같다.

단추를 달다 바늘에 엄지손가락이 찔렸다. 따끔하다. 피가 몽실몽실 난다. 피가 손가락을 입으로 빨아 피를 빼내는데 가슴이 저며 온다. “주님, 죄와 흘리기까지 싸우게 하소서. 더럽고 추악한 죄를 깨끗이 씻겨주옵소서. 실이 닳아서 단추가 떨어지듯 정욕의 줄이 떨어져 끊어지게 하소서.

죄인은 언제쯤 정결케 되어 하늘나라의 예복을 입을까?

 

하늘나라 예복을 입기까지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고, 누구든지 사후에는 심판을 받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가 피할 없는 가장 문제이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이미 사형선고(2:32) 받고 나왔다. 사형집행날짜는 날이 갈수록 우리에게 육박해 오고 있다. 여기에 우리의 심각한 영혼 문제가 달려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한다면 죄를 범할 수도 없고 죄를 숨길 수도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무관심하고 심지어는 이것을 생각하기 조차도 싫어한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죽음은 자신에게 무관한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이 사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날을 준비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땅의 낡고 닳아 없어질 옷이 아닌 영원한 나라의 예복을 준비할 때이다.

“그러나 사데에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3:4).

사데 교회의 많은 성도들 중에서 ‘그 옷’ 자기 행실을 빨아 정결케 되었기 때문에 이미 땅에 살면서 흰옷을 입은 사람이 명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다. 명의 성도들은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행실이 정결해진 성도들이므로 땅에 살면서도 흰옷을 입고 주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흰옷은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라면 누구든지 입어야 되는 천국의 예복이다. 흰옷은 정욕과 죄성이 실업자같이 되어 죄성이 뿌리 뽑혀야만 입을 있는 거룩한 옷이다. 마치 실이 낡아서 단추가 떨어지듯 애굽의 수치 죄성이 굴러 떨어져야만 입을 있는 옷이다. 땅에서 흰옷을 이미 입으신 분들은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 되셔서 완전한 구원을 보장받으신 분들이다. 사도 바울, 프랜시스, 이용도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같으신 분들이다. 이분들은 영원히 낡지 않을 천국의 예복을 땅에서 이미 준비하신 분들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흰옷을 준비치 못한 사데 교회 목회자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 스스로 자긍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땅에 사는 목적은 바로 마음과 행실이 정결케 되어 천국의 예복, 흰옷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먹고 마시고 놀고 자고 이곳저곳 쇼핑을 하면서 허송세월을 얼마나 많이 보냈던가? 더럽고 냄새나고 찢어지고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서도 창피한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정욕과 죄성에 빠져 벌거벗은 하나님 앞에 있으면서도 말이다.

“내가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남은바 죽게 것을 굳게 하라. 하나님 앞에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3:1-3).

겉은 멀쩡한데 실제는 만한 없다. 겉은 달콤한 듯하나 속빈 강정이다. 겉은 화려한데, 속은 회칠한 무덤이다. 살았다 하나 죽은 자인 것이다. 철저히 회개치 않으면 도적같이 임하실 주님의 엄위하신 진노 앞에 누구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자기 행실을 빨지 못한 죄인도 마찬가지이리라.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

우리는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소매가 짧은 옷일까? 아님 한쪽은 짧고 한쪽은 바지를 엉거주춤하게 입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일까? ‘두루마기 자기 행실을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22:14) 하지 않았던가?

주님의 재림이 다가오고 있다. 임박한 환난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일은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함으로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주님은 지금 시간 예복을 준비치 못한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보게 하라”(3:18).

라오디게아 목회자처럼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성경도 알만큼 알고, 이곳저곳에서 강의 한다고 칭찬도 듣고, 글도 쓰고, 어느 단체의 리더가 되어 행정과 논리도 뛰어나다고 자긍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기도, 금식, 전도, 사랑실천 남들만큼은 한다고 자긍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는 아직 예복을 입기에 턱없이 부족함이 많다. 마음과 행실가운데 나타나는 구석구석 숨겨진 지극히 작은 죄까지도 흠과 티와 주름이 없도록 철저하게 빨아야 한다. 묵은 때가 빠지지 않으면 락스를 넣어서라도 비비고 문질러서 빼야 한다. 빨래 방망이로 팍팍 두들겨서 더러운 때를 깨끗이 빨아야 한다. 대충대충 적당히 해서는 된다.

생각으로 미워했거나 질투했거나 음란한 마음을 품었다면 즉각즉각 철저히 회개하여 깨끗이 빨아야 한다. 목사가운, 박사가운, 성가복, 수도복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누구든지 마음과 행실이 깨끗케 되어 흰옷을 입어야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릴 있다. 영원히 주님과 함께 행복을 누릴 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상이 내게 있어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22:12-13).

, 우리 주님 속히 오신다고 거듭거듭 말씀하신다. 의롭고 거룩한 사람에게는 상을 베푸시고,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사람은 벌을 내리시려고.

올해도 벌써 가고 있다. 창가에 오동잎도 떨어지고 산자락에 겨울 찬바람이 불어 때면 무릎이 더욱 시려온다. 시린 무릎을 꿇고 주님의 보좌를 바라본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시오. 우리 주님 가까이 오고 계시오. 다른 사람 무어라 말을 하든지 다른 사람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우리 실속 우리가 차려야 하오. 우리 행실 우리가 빨아야 하오. 지옥 가서 때늦게 후회할 테면 살아생전 세상에서 어서 빨리 회개하시오. 언젠가는 죽을 인생, 늦기 전에 서둘러 회개하시오. 지금 영원한 천국 복을 선택할는지 영원한 지옥 형벌을 쌓을 것인지 결정하시오. 눈을 뜨고 아침에 일어나거든 하루를 최후로 생각하시오. 밤이 되어 자리에 눕게 되거든 임종하는 자리로 준비들 하오. 주님! 저희를 굽어 살피소서.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