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린 것들을 찾아서

잃어버린 것들에 애달파하지 않으며 살아있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으며라는 복음성가의 가사는 더 이상 이 세상 것들에 매이지 않으리라는 다짐이다. 반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일곱 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현대소설인데, 과거를 회상하며 전개되는 기억기술법이 격자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나간 중요치 않은 것들에 대한 자유로운 거닐음이다.

하지만 잊어선 안 될 것을 잃어버린 것들이 몇 개 있다. 영혼을 위한 시간들, 이를테면 살아가는 이유, 인생 순례의 목적지, 지금 정말 바른 길을 가고 있나 등은 동물이 아닌,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서 결코 등한히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는 시간이 영혼을 위한 시간이다. 사랑으로 기도해주는 사람들이나 내가 사랑할 사람들도 잊어버려선 안 되지만, 이런 영적인 시간들은 분주한 삶 속에 어느 순간 잊히고 마는 것이다.

중요치 않은 것들이 중요한 것들을 대체해버리는 삶은 허망하다. 그렇게 밀려 가다보면 허무라는 절벽에 도달하여 공허함을 응시하거나, 별 볼일 없는 것들이 이미 중요하게 자리하여, 변형된 삶의 중심에 선 자신을 보고 만다.

내게 얼마간 잊힌 것은 도서관이다. 날이 너무 더워 견디고 견디다 드디어 도서관으로 탈출했다. 내가 찾는 도서관은 삼면이 숲으로 둘러싸인 녹색도서관이다. 그중에 제일 좋아하는 자리는 녹음이 코앞에 보이는 창가다. 왜 이 좋은 것을 잊고 살았나. 분주함이 이유일 수는 없다. 비단 더위를 피해 가는 곳이 도서관이 아니다. 자주 가야 하는 곳이 돼야 한다. 독서에 대한 의무감 없이도 그냥 그곳에 가서 조용한 시간을 갖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영성산책을 할 수만 있다면, 자주 기억하여도 좋은 곳이다. 종일을 낼 수 없다면 반나절, 아니 한두 시간만 머물다 와도 삶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곳이 도서관이다. 사실 도서관은 영적인 곳의 모형이다. 우리 영혼이 정말 쉴 만한 영적 도서관은 어디일까. 온갖 영성의 향기가 머물고 신성한 생명의 기운이 가득 찬 곳, 모든 지혜와 총명이 가득하고 빛과 사랑이 흘러넘치는 곳. 이런 곳이 있다면 이는 가히 진정한 영적 도서관이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11:28-29). 바울 사도는 그분께 배워 이렇게 고백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사실 주님이 가장 원하셨던 것은 행동이 바른 삶도, 의로운 규칙도 아니었다. 그런 것은 다 필요한 것이나 주님이 가장 원하신 것은 아니다. 주님이 가장 원하셨던 것은 주님의 발밑이었다. 언제나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맛보는 것, 아무 말 없이도 그냥 주님과 함께 있는 것,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이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었다. 거기가 진리의 보고, 지혜의 샘, 영적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은 100년만의 더위라지만 앞으로 10년 후엔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끔찍한 세상이 될 거란다. 잊었던 것이 처음 사랑이라면 어서 찾아가자. 영혼을 위한 조용한 시간이라면 지금 모든 것 내려놓고 거기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