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한 자의 성찰
 
살아오면서 점점 더 깨달아가는 게 있다. 왜 저리 신록(新綠)들은 싱그럽고 새순들이 정겨운지, 왜 생물의 모든 어린 것들이 사랑스러운지. 반면에 모든 것을 잘 견딘 것들은 왜 그리 존경스러운지, 열매로 인해 고개 숙인 것들은 왜 다 숙연함을 느끼게 하는지. 결론은, 거기에 하나님의 겸손과 사랑의 빛이 있다는 것이다.

겸손한 색은 강렬하지 않다. 딱 연둣빛이다. 연한 순도 겸손이고, 풍파를 겪으며 잘 견딘 열매도 겸손하다. 연두 싹들은 이제 펼쳐진 세상 앞에 아무 경험 없는 자의 어쩔 수 없는 겸손이지만, 익은 열매는 조물주 앞에서 거들먹거려선 안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이의 체득된 겸손이다. 실은 자기가 한 일은 그냥 서 있었던 것뿐이었고, 빛도 물도 공기도 다 조물주께서 베푸신 거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바로 그 겸손이다.

기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겸손을 배우고 익히는 데 써야 할까. 시작할 때 아무것도 몰라 자연적이었던 겸손이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며 교만의 짙은 색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번개도 필요하고 폭풍도 필요하다. 하늘로 치솟다 쓰러졌을 때 다시 밑 둥에서 나는 새순이 잃어버린 겸손의 색이다. 이 모든 것을 견디며 낮추고 낮춰진 이들은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빛 중 가장 강렬한 빛은 바로 겸손의 빛이셨다. 나실 때부터 짐승의 구유에 누인 그 겸손은 천민들과 병자들 속에서 빛나셨고, 제자들의 발을 닦이시며 부정한 과거로 아팠던 여인에게 발을 닦이도록 맡기시며 더 밝게 빛났다. 결국 십자가에서 주님은 눈부신 겸손의 빛으로 교만한 자들의 완악함을 초라하게 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겸손한 이들은 참으로 복되다. 그들은 겸손의 왕이셨던 예수님과 연결된다. 겸손한 이들은 무슨 일 앞에서도 불안해하거나 근심하지 않는다. 겸손의 주님께 맡겨드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만한 이들은 진정한 쉼을 갖기 어렵다. 늘 염려와 근심이 많다. 넘겨짚기 때문이고, 지레 걱정하기 때문이다. 자기 입지를 견고케 하려 당을 짓고 파를 나누느라 고민이 많다. 남이 잘 되는 것이 불편하고 자기가 안 되는 것은 속상하다. 자꾸 불순한 색이 끼어들어 갈수록 칙칙해진다. 투명하지 않다. 속모를 궁리가 많고 번잡한 계산도 많다. 사망으로 인도하는 세상 근심이 늘 가까이 있다.

반면 겸손한 이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근심이 많다. 늘 겸손하고 순결하셨던 주님께 죄송함이 많아 자신의 교만을 자주 회개한다.
겸손한 이들은 문제마다 자신의 부족을 찾지만, 교만한 이들은 그때마다 타인의 잘못을 지적한다. 겸손한 이들은 타인이 더 낫다 여기지만 교만한 이는 타인의 부족함 때문에 손해 본다 생각한다. 이래저래 속상한 이들이다.

나는 어떤 자일까? 순결을 소원하고 겸손을 꿈꾸나 맺히는 건 교만일 뿐이다. 나는 겸손한 척하나 어찌할 수 없이 교만하며, 나이가 들수록 직분이 높아갈수록 겸손은 저 멀리 달아나나 애써 그를 따라잡지 못하는 나는 어찌 해야 하는가. 그리고는 지나온 생애나 추억하려 하는 교만한 나는 어찌 해야 하는가.

박상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