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르게 분별하는 것은 필요하다


예수님의 판단

예수님께서도 판단하신 일이 많았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사두개인들, 율법사들 모두가 다 종교지도자들인데 예수님께서는 항상 그분들을 판단하면서 진리를 말씀하셨다. 물론 똑같이 비방을 한다거나 아니면 혈기를 내면서 한다거나 교만함을 나타내진 않으셨다. 그건 죄성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바르게 분별하는 것은 필요하다.

우리 기독교 역사 가운데 훌륭하게 증거했던 분들, 또 설교하신 분들이 잘못된 것을 판단해서 이야기하셨다면 그것도 다 잘못이라고 해야 될 것 아닌가. 그러니까 전도를 하고, 또 빛에 대한 진리를 설교나 상담을 통해서 증거하려면 항상 빛과 어두움을 잘 판단할 수 있어야 된다. 그런데 성경에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혼동에 많이 빠지는 것 같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판단은 다른 사람들을 악심을 품고 판단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비방하거나 모욕하거나 후욕하거나 괴롭히거나 무시한 것을 판단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가운데서, 또 마음속에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온유하고 자비롭고 인내하는 마음을 품고서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을 얘기하는 것은 괜찮다.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23:27)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보시고 그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다. 겉으로만 보이기 위해 거룩한 체, 경건한 체하지만 실상은 불법과 부정이 가득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눈에 당시 신앙의 모습은 하나님과 생명의 말씀에서 떠난 죽은 자와 죽은 자들이 있는 무덤으로 보였을 것이다.

, 독사의 자식이란 표현까지 쓰시면서 진리를 증거하셨다. 중요한 것은 혈기를 품고 교만한 심정을 품고, 아집적인 마음을, 질투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어두운 마음을 품고 하는 것은 범죄하는 것이다. 혈기가 올라오는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회개를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온유한 심정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이나 동정하는 마음,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영적 권위와 육적 권위

사도 바울은 많은 기적을 일으켰는데도 겸손하게 사역하셨다. 그러나 요즘 목회자들은 그렇지 않다. 자랑도 하고 자기 권위를 내세우기도 한다. 어떤 목사님들은 권위가 있어야 된다고도 말한다. 순수한 영적 권위를 얘기하는 경우도 조금 있는 것 같지만, 대부분은 육적인 방법으로 권위를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등신”, “호랑이가 물어갈 놈이런 얘기를 하기도 한다. 이것도 은혜야 하면서 웃는다.

그러나 성경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4:29)고 하셨다. 이런 말씀은 중요시하지 않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권위를 내세우려고 한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육적 권위가 생기기 쉽다.

목회를 잘 하려면 석사학위나 박사학위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사실 육적 권위지 영적 권위는 아니다. 영적 권위는 사랑을 실천하고 겸손을 실천하고 온유와 절제와 충성과 자비를 실천하면서 열두 가지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써 사람들한테 존경받는 것이다. 그래서 잘 따라주는 것이 바로 영적 권위다. 그러나 학위를 높이고, 가문을 자랑스럽게 나타내고, 이것저것 세상적인 것들을 가지고 존경받고 사랑받고 높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육적 권위다.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 권위를 세우려고 하지 말고 겸손하게, 있는 그대로 맡은 직분을 잘 감당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회장이니까 잘 해봐야지.’ 이런 것을 지나치게 생각하다 보면 거기에 권위주의가 들어가게 되고, 아집적인 면이나 독선적인 면이 생기기 쉽다. 우리는 성화되기 위해서 그런 것을 자꾸 닦아나가야 한다.

폭넓고 온전한 지각

히브리서 5장에 장성한 믿음에 대한 설명에 지각이라는 말이 나온다. ‘자는 알 지()자에 자는 깨달을 각()자다. 그러니까 지각한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격적인 성장을 하게 되는 때부터 지각이 정상적으로 열린다.”고 말할 수 있다. 지적으로 올바르게 깨달아야만 그 지식을 따라서 정상적인 영적 진보를 가져온다.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잘 무장되지 않으면, 잘못된 신앙에 빠지기 쉽다. 성장하면서 점점 더 폭넓게 깊이 있게 깨달아지는 것이다.

우리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말씀으로 적용하려면 산 지식이 되어야 한다. 듣기만 하고 머릿속에 담아놓기만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죽은 지식에 불과하다. 그러다가 영감을 통해서 온전한 깨달음을 얻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지적인 면에서도 발전을 하게 된다. 점점 더 튼튼한 지식으로 무장이 되면, 실천에 있어서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힘찬 발걸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이 부족하면, 그 불완전한 바탕 위에서 실천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이 튼튼하지 못할 수 있다. 지각이라는 말 대신에 지성이라든가, 지식이라든가, 이런 것을 필요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고 지각은 점점 폭이 넓어지고 온전해져가는 것이지 단번에 되는 일은 없다.

지각이 더 높은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충분한 설교나 강의, 증거내용이 있어야만 된다. 그런데 큰 교회들을 보면 성도들 전체를 생각하면서 설교하다 보니 수준이 높을 수가 없다. 천로역정에서 말하는 쁄라까지 도달하게 하고, 또 중간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익은 열매에 도달하게 하는 그런 지각을 심어줄 수 있는 설교를 듣기는 어렵다.

익은 열매가 된 분들의 체험적인 내용, 행실의 내용, 인격적인 변화, 또 여러 가지 쓰라린 고난을 겪으면서 통과하는 연단과정, 그런 것이 종합적으로 증거되어야만 지각이 잘 열리게 되고, 그 목표를 지향해서 꾸준히 나아가게 된다. 그야말로 자기의 생사를 걸어놓고, 자기의 모든 시간과 재능과 인생 전체를 걸어놓고 달려가는 길이다.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설교가 별로 없고 아주 빈약하다.

천국 가기 위해서 교회 간다.” 이것도 얼마든지 최고의 높은 경지에 대한 신앙관을 담아서 설명할 수 있는데, 그냥 막연하게 천국이라고 하는 어떤 행복한 나라가 있는가 보다.’라고 하면서 거기 가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것처럼 생각하면 어린아이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천국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되면, 그 목표를 향해서 조금이라도 더 달려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평생을 달려가도 가장 높은 천국, 다시 말해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목표에 도달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