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만춘은 고구려 변방 안시성의 성주였다. 당 태종이 20만의 군사로 공격했을 때 단 5천 명의 군사로(40:1) 승리로 이끈 용장이다. 중국의 빈번한 공격에 맞서, 비중이 있는 장수로서는 양만춘이 적격이었다. 성의 운명은 거의 성주에 달렸다. 

어느 도시의 교회에 부임 받은 목사는 그 도시에 대고 외쳤다. “이 도시 사람들로 지옥 가기에 어렵게 만들고 천국 가기에 쉽게 만들리라.” 그 도시에 시장이 있지만, 영적 시장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심을 알았다. 그 도시의 지금까지의 수령, 마귀는 겁냈을 것이다.

골리앗과 대결하여 싸운 다윗의 나이는 16세로 추측한다. 그는 싸움의 능력을 무력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힘을 빌릴 줄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과감하게 나아가 천하무적의 장수의 목을 베었다(삼상17:51). 반면 질투에 점령당한 왕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군대를 파견했다. 엘리야를 잡으러 갈 때 오십 부장과 50명을 보냈으니까(왕하1:9). 50명 군인을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부대는 다윗이 머무는 라마 나욧에 도달하는 순간 무장해제를 당한다. 두 번째 다시 보내고 세 번째 역시 그곳에 당도하는 순간 모두 기능 마비다. 

그 까닭을 밝힌다.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삼상19:20). 이에 조급한 사울 왕은 자기가 친히 군사를 인솔하여 달려갔다. 목적지 마을 가까이 이르면서부터 그 역시 예언을 하고 황홀 상태에 빠졌다. 라마에 있는 나욧이라는 선지자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사무엘 선지자가 수령으로 이끄는 영적 위력이다. 아무리 포악한 자라도 거기만 가면 강한 이끌림을 받았다.

70명 친족 중에 당신이 믿음을 먼저 가졌는가? 교회의 중직까지 맡은 신앙의 경력이 깊은가? 명예가 아니고 은총이다. 분명, 가문의 수령이 되어야 한다. 경력과 경험이 적을지라도, 믿음을 가진 기간이 짧더라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라면 당신은 분명히 흑암에 있는 저들에게 영적 수령으로 등급을 가진 자다. 천국 길로 인도하는 천국 알선자로 지명받은 자다. 목회자는 물론이다. 더더욱 선교사도 그렇다. 

성 다미안 선교사는 벨기에서 하와이의 몰로카이 나환자 수용소로 파송 받았다. 환자들의 영적 상태는 냉랭하다. “자신은 건강한 몸이기에 믿음을 가지고 살지만, 우리처럼 날마다 썩어간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복음이 먹히지 않는다. 다미안은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이여, 저를 나환자로 만들어 주옵소서.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죄인같이 되었던 예수님처럼, 나환자를 구하기 위해 나환자가 되기 원합니다.” 

얼마 후 촛불에 손을 얹었는데도 뜨거운 줄 모르고 그저 대고 있는 것을 옆에서 보았다. 나환자가 된 것이다. 감각이 무디어지고 눈썹이 빠지고 관절이 떨어져 나갔다. 손가락 마디가 빠져나간다. 그때부터 환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인다. 단 3년 만에 800명이 주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내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나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형제들이여, 내가 죽거든 새벽마다 엎드려 기도하던 해변의 빠뿌아 나무 그늘 밑에 묻어다오.” 그는 5년 후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 섬은 아름다운 땅, 천국을 이뤘다. 

어느 전도자는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강퍅한 모습을 보는 순간 ‘네게 있는 땅을 그에게 주라’는 감동이 왔다. 물려받은 유일의 토지를 그에게 주었다. 사랑을 전달받은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의 딸로 은혜롭게 산다. 사랑의 위력이다. 희생적 사랑이 수령의 자격 기준이 된다. 할렐루야!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