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잃어버린 영적인 유산, 영성의 대가들
도처에서 ‘좋은 어른’은 고사하고 어른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볼멘소리가 가득하다. 내가 적임자라 나서는 사람은 많지만 막상 조직이나 사회에서 직분을 맡아 일을 할 때 진심으로 따를 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한편으론 아랫사람에게 마땅히 훈계해야 하지만 나이나 직분으로 누른다는 ‘꼰대’ 소리 들을까 아예 침묵해버리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무작정 누르는 이와 지레 침묵하는 이들 모두 바람직한 어른은 아니다. 진심으로 따를 수 있는 어른의 부재가 안타까운 시대다. 
 
 
실종된 권위의 시대

사실 어른노릇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직분과 사명, 일, 육아, 교육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더구나 조직사회에서 생존한다는 게 그리 녹록치 않다. 때문에 ‘권위의 부재’가 여러 사회적 문제를 관통하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탈 권위, 자율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권위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반문이 들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란 힘으로 누르는 것에 할 수 없이 복종하는 것이 아닌 자발성과 신뢰를 기반으로 감동되어 따름을 의미한다.
어떤 집단이 같은 권위를 따른다는 것은 깊은 신뢰 관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야 하겠지만, 한국은 여전히 과거의 가부장적인 강압적 권위의 그늘이 더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권위 실종에 따른 결과로 각종 규제와 통제가 넘치는 사회는 집단적인 분노게이지만 올라갈 뿐이다. 권위가 사라진 빈 곳을 메우는 규칙들이 권력 및 강요된 복종에 의해서만 제 역할을 하고, 이는 다시 규제를 불러오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권위는 강압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고 다툴 때 주님께서 교훈하신 말씀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마20:26-28)
 
 
 
그리움만 남은 시대

지난 최근 62세로 이 땅을 떠난 이희돈(세계무역센터협회 부총재 역임) 장로에 대한 SNS의 추모영상에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그는 2001년 9·11테러 당시 비행기테러를 당한 뉴욕 세계무역센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후 전 세계 한인 교회를 다니며 수많은 사람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 했다. 댓글을 보면 하나같이 깊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감사를 표현한 내용이었다.
그의 간증을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 용기를 얻은 사람, 소명을 새롭게 깨달은 사람 등 모든 이들이 새삼 그를 그리워했다.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예수님 믿으면 천국, 안 믿으면 지옥, 그것밖에는 없습니다.”였다. 62년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위해 불꽃처럼 살았단 평가다.
이태형(기독문화연구소) 소장은 이런 수많은 그리워하는 댓글을 보며, ‘우리는 누구를 그리워하는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이희돈 장로뿐만 아니라 ‘그 청년 바보 의사’로 불린 안현수, 예수님의 마음으로 무료 의료선교를 했던 장기려 박사, 나치에 대항했던 독일의 본회퍼 목사 등, 이 땅을 떠났지만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그리움이 남아 있다.”라고 했다.
덧붙여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들이 생전에 이뤘던 업적 때문이 아니라, 그들 삶에 순백의 진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가 결국 보는 것은 그들이 지녔던 명성의 앞면이 아닌 뒷면이다. 그들은 참된 헌신과 사랑, 믿음, 따뜻함, 성숙한 인격 등을 보여줬기 때문에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겼던 것이다.
 
 
교회가 잃어버린 유산

지금 우리가 상실한 것 가운데 하나는 그리움이다. 예전에는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고 경종을 울렸으나,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다 못해 적폐의 대상으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 교회가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이다지도 세상에 무참히도 짓밟히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바른 소리 해줄 참 어른이 없다는 것이 심히 슬프다. 다들 자신이 애국자요 의인이라 자청하지만 울림은커녕 오히려 반감만 든다. 성경과 예수님에 대한 말은 많은데 정작 그 주님의 영성을 닮은 어른들은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초대교회의 12사도들과 교부들, 기독교 역사의 계보를 잇는 영성의 대가들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힙포의 감독 어거스틴, 아씨시의 프랜시스, 개혁자 마틴 루터,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 요한 웨슬리, 일본의 하천풍언, 인도의 썬다싱, 한국의 이용도, 주기철, 이성봉, 손양원 목사 등 말이다. 
하나님은 이런 영성의 대가들을 통해 부패한 교회와 사회를 정화시키고 새롭게 하셨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 영성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인 부와 명예를 추구하다가 하나님께 매를 맞고 있다. 그간에 기복주의·물량주의·믿음만능주의 누룩을 제거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문재인 정부와 코로나19로부터 듣고 있다.
하도 정부의 탄압과 언론의 질타를 당하니 이제야 겨우 교회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성찰하기 시작하는 듯하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보다 더 깊고 폭넓게, 말로만 아닌 삶과 인격으로 알려주셨던 영성의 대가들을 되찾아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고전11:1,2)
‘미치자. 미치자. 예수님께 아주 미치자’ 절규하였던 이용도 목사님, 동인 동신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 삼아 원수 사랑의 본을 보였던 손양원 목사님, 김포 일대의 수천만 평 땅을 무상으로 피난민들에게 주었고, 고아원 하던 3000평 마저 탐내는 자에게 빼앗겨도 찬송을 흥얼거리며 감사했던 최춘선 목사님이 그립다.
재물과 권세와 탐욕에 찌들어 악취가 나는 우리를 말끔하게 씻어줄 영성의 대가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 무엇이 빛인지 어둠인지, 무엇이 영적인 것인지 육적인 것인지, 하나님 중심과 내 중심의 차이를 명쾌하게 깨닫도록 깊은 울림을 주는 그런 어른들을 만나고 싶다.
그 어른들을 생각하니 내 연약함과 부끄러움에 심히 통회자복 하고 싶다. 날씨도 점점 추워지는데 내 마음은 어찌 이리 시리단 말인가. 머지않아 북풍한설 몰아치는 대환난의 겨울이 다가올 터인데, 우리의 마음 한켠 따뜻하게 데워줄 영적인 스승님이 사무치도록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