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 무엇이라 대답하리요

욥의 삶은 하나님도 인정하신 순전한 삶이었습니다. 엄청난 환난 가운데서도 범죄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았습니다(1:22). 날벼락과도 같은 거센 고난의 바람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고, 친구들은 엄청난 재난의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욥의 실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그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생명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지난 날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일이 없느냐며 환난의 원인을 욥에게서 찾으려 합니다. 무수한 재산을 잃어버린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10명의 자식을 한 날에 모두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지도 않은 채 친구들은 욥의 죄를 들춰내려고만 합니다.

엘리바스는 재난은 사람이 스스로 빚어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빌닷 역시 하나님께서 죄 값을 물으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소발은 악에서 손을 떼라고 합니다. 젊은 엘리후도 우리가 당하는 모든 재난은 인과응보적인 것이며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사람을 구하시고 교육시키신다는 내용을 충실하게 설명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대 놓고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고통스런 자신의 심경을 토로합니다. 결론이 나지 않는 욥과 친구들의 허탈한 공방전을 쭉 지켜보시던 하나님께서 폭풍 속에 나타나시어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시면서 자신이 창조주 되심을 재인식 시켜주십니다.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 욥을 몰아세우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38:4), “누가 도량과 준승을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38:5),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으냐?”(38:6),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38:8). 하나님은 쉰다섯 가지의 질문을 하십니다. 욥은 단 두 마디의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40:4-5). 전능하신 하나님의 질문에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대답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암사자를 시작하여 동물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암사자, 까마귀 새끼, 산염소, 들나귀, 들소, 타조, , , 독수리, 하마, 악어를 지으신 분이 인간을 지으신 분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들 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39:5) 들나귀는 온순하거나 얌전하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짐승에게 속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빠른 것은 들나귀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은 들나귀를 붙잡아 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들나귀에게도 하나님은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삼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제 멋대로 하기를 원하고, 자기의 빠른 젊음을 이용하여 어디든지 다니기를 원하는 들나귀에게도 안식할 수 있는 처소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처소는 가장 평화로운 넓은 들판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그 처소를 이 땅과 하늘에 두셨습니다.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 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괘념치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 내가 지혜를 품부하지 아니하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니라. 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39:13-18).

타조는 2개의 발가락이 있으며 시속 70km 정도까지 빨리 뛰며 날개는 있으나 날지는 못합니다. 새 중에서 가장 크고 시력과 청력이 매우 발달되어 있습니다. 주로 알은 수 타조가 밤에 품고, 낮엔 암 타조가 품지만 알이 상하거나 약탈당할 것을 괘념치 않고 자리를 잘 뜹니다. 그리고 위험을 감지하면 수컷이든 암컷이든 보금자리와 새끼를 버리고 떠나 새끼들을 거칠게 다루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이런 타조의 특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창조주가 타조에게 지혜를 풍부하게 주시기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이 지으신 모양과 형상대로 또 그 의도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들을 다스리며 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향한 지으신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그 뜻이 내 뜻과 맞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분의 뜻대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욥이 아무리 의롭고 순전하여도 하나님은 그의 모든 것을 취하여 가실 수 있는 주권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걸 욥의 연단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든 살리시든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며 주님이 어찌하시든지 나는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니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음을 욥의 고난을 통해 깨닫게 하셨습니다.

내가 선하고 의롭다며 쌓은 알량한 의(), 신앙의 경력도, 남들이 인정할 만한 훌륭한 업적도,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며 품는 계획과 목적도, 하나님이 흩으시면 하루아침에 모두 허사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연단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들의 영혼을 성숙케 하시고 지혜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알아 가는 것. 그것이 참된 지혜이며 지식임을 고통을 통해 깨닫게 하시니 연단이 축복이라는 말이 진리임을 가슴에 새겨봅니다. 주님 앞에서는 어떤 말도 필요 없고 예, 한마디만 해야 할 뿐임을 다시 알게 하십니다.

이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