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서 만나자

사막은 완전한 비움이다.

철저한 자아 포기가 가능한 가장 비천한 곳이다.

사막은 한계와 무기력이 드러나는 곳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의 장이다.

침묵과 잠심의 빈자리가 마련되는 곳이며

그 빈자리에 하나님의 은총이 살며시 드리우는 곳이다.

달콤한 속삭임

‘사막의 성자’로 불리는 예수의 샤를 드 푸코(1858-1916)는 그 황량한 사막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았다. 푸코는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의 사치와 방랑 속에서 보냈다. 27세 때 신앙의 눈을 뜬 그는 “하나님께서 존재한다고 믿게 되자마자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성자로 불리는 푸코의 위대한 신앙가치관 중 절대적 최고 순위는 고독하고 가난하고 겸손 된 ‘나사렛’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비천하게 되는 것이 자신의 원칙’이라고 생각했던 푸코는 43세 이후 사하라 사막의 오지 타만라셋으로 건너가 1916년 암살될 때까지 15년간 이교도들 가운데 살면서 종족을 넘는 형제애를 보여 주었다.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았던 곳, 30년간 노동과 기도 속에 머물렀던 곳, 나사렛의 삶을 재현하는 것은 푸코 영성의 출발점이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것을 어려워한다. 어느 순간 혼자라는 느낌만으로도 우울함과 슬픔의 정서에 자신을 던져 버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지하고 격려할 때 가장 힘을 얻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참을 수 없는 외로움과 고독에 슬픔을 느끼고 사회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자살이라는 극단 역시 우울증이 원인이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일찍이 인간에게 가정과 사회를 이루어 구성원을 만들어 주셨고 함께 할 수 있는 지체를 이루게 하셨다. 그러면서 또 이상한 일은, 혼자만 예수님을 만나러 오라고 우리 각자를 부르신다는 사실이다. 화려한 궁정과 도시와 사람들을 떠난 푸코가 사막으로 들어가 철저히 고독과 외로움을 벗 삼아 주님을 만난 것처럼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달콤한 속삭임이 있다.

골방으로의 부르심

골방은 햇볕이 들지 않는 작은 방을 말한다. 구약에서 골방은 왕궁에 있는 방(왕상6:5, 8), 성전에 있는 방(대상23:28, 스8:29), 신랑 신부의 신방(욜2:16) 등으로 언급되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소로서의 골방이 언급되어 있다(마6:6). 이 골방은 신약시대에 특별한 물건을 보관해 두는 작은 창고로 사용한 방을 말한다. 고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골방은 작고 어둡다. 그러면서 보물을 쌓아두는 장소라는 의미를 덧붙일 수 있다. 그곳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가 뭘까.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6:6). 성경에서 의미하는 기도의 골방은 내 마음이 주변 환경과 사람들에 대하여 문을 닫고 온전히 하나님께로만 열린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번화한 길을 걷거나 운전하거나 땀 흘려 일하면서도 골방 기도는 가능하다. 기도의 자리가 준비 되지 않아도 내 마음의 방을 열어 주님을 모시면 그곳이 곧 주님과 나만의 골방이 되는 것이다. 가장 달콤하고도 진실하게 주님, 하고 부르면 주님 역시 얘야, 하면서 우리를 맞아 주시는 곳이다. 기도시간이 없고 장소가 마땅치 않다고 투덜거리는 우리들에게 주님이 마련해 주신 골방은, 하루에도 수차례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지만 그 문을 여는 우리의 손은 너무 느리고 무겁기만 하다. 주님과 대화를 하면서 편히 쉬는 그 장소로 자주 갈 수 있는 사람이 주님을 차지하는 데 말이다. 한꺼번에 힘을 모아 소리를 높여 드리는 힘 있는 기도가 있다면, 나와 주님만이 느끼는 황홀하고 은밀한 즐거움이 있는 기도가 골방기도다. 때와 장소가 필요 없다. 시간이 필요치 않다. 예수님, 하고 부르기만 하는 되는 곳이다.

세속에서 살되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규칙 속에 살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삶. 하나님의 뜻에 단순하게 자신을 내맡기며 하나님의 안배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이 사막에서 얻은 푸코의 지혜였다면 지금 우리의 순간을 다스리고 지배할 기도의 힘은 골방에서부터 나올 수 있음을 기억해 보자.

자주 혹은 때때로, 골방의 문을 열어 본 사람이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은, 사람들을 피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위대한 성자들의 기도가 아니어도 좋다. 주님이 계시고 내가 주님을 좀 더 가까이 만나는 장소로 골방이 즐거움의 장소가 된다. 주님과 나만의 만남의 장소. 사람들을 피하고 쾌락을 피해 골방을 찾고 싶어진다. 물론 어느 땐 빈방에 홀로 남아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그런데 깜깜한 빈방에 앉아서 우두커니 홀로 앉아 시간만 보낸 것 같아도 그 방에 들어갔다면 잘한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골방에 들어가 잠을 자더라도 그 방에 들어간 내 동기가 선하다면 말이다.

시간이 남아서 태만과 짝하고 사람들을 찾고 무언가 관심꺼리를 찾아내고 싶은 우리안의 정욕들이 가장 싫어하는 방.

역설의 방

참 이상한 것은 골방에서 우리가 드리는 은밀한 기도는, 언제나 공개적으로 갚아주신다. 참 역설적인 우리 하나님.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혼자 오라고 부르시더니 이제는 공개적으로 우리를 높여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찬란한 슬픔처럼 슬퍼도 슬퍼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결국 나타내 주신다. 주님과 나만의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기도가 그것이다. 은밀하다는 것은 숨겨진다는 것이다.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 해결을 위해 구하지도 않고, 하소연을 하며 매달리지도 않아야 은밀함은 은밀함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것을 가지고 골방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일 먼저 알려드리면 그 은밀함은 가장 빛나는 역설의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곤 한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나 문제가 생겼을 때, 혹은 기대와 바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먼저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 한다. 사람의 도움이 먼저 눈에 보이기 마련이다. 그게 우리 연약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것을 고스란히 남겨두었다가 하나님과 만나는 골방으로 가져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인내가 필요하다. 그런데 신기한건,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던 순간을 넘어 서서 골방으로 먼저 가져간 일들이, 골방을 벗어난 순간 가장 밝은 역설로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이치와 방법이다. 약속이시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주님께서 갚으시리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인 것이다.

주님과 나만의 시간

죄인을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위대한 대속의 사랑은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인데 그 놀라운 역설의 은총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음에 순간순간 감사치 않을 수 없다.

때론 누구도 몰라주는 괴로움이나 아픔, 문제들을 안고 찾아가도, 그냥 가만히 쉬고 싶을 때도, 골방은 주님과 나만의 방이다. 부끄럽고 추한 것들을 혼자 꽁꽁 감추고 있다가도 골방에 들어가면 스르르 풀어 놓게 된다. 나와 주님과만 있는 시간. 분주한 세상과 바쁜 사람들 틈을 벗어나서 언제라도 들어가면 반겨주시는 주님이 계신 곳. 그곳은 언제나 문이 열려있기에 우리가 마음을 열어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주님과 가장 친밀해지는 즐거움을 기대하면서 살짝 노크하며 들어가 보자. 내가 들어가는 순간 주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누가 묻거든 사막의 골방으로 들어간 푸코 성인의 말을 빌어 말해주리라.

당신이 들어간 골방은, 하나님의 은총이 살며시 드리우는 곳입니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