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십자가는 어디 있나요


올 초 2, 교회 청년들과 일본에 순교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일본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과 민족적인 상처, 미움들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무엇보다 순교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새로운 은혜를 체험코자 함이 목적이었다. 나가사키 순교 성지의 언덕에 오르면서 많은 생각이 교차하였다. ‘일본 땅에 순교성지라니,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일본 나가사키, 빈센트 권

1626620, 일본 나가사키 언덕엔 아홉 명의 사람들이 끌려와 화형을 당했는데 그 속에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권 씨 성을 가진 조선남자 ‘빈센트 권’이라는 사람이다.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최초의 신자는 1784년 세례를 받은 이승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보다 무려 200여 년 전에 신자가 된 조선인들이 있는데, 1617~1632년에 일본에서 순교한 사람들을 작성한 <205인 순교복자 명단>에 이들의 기록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빈센트 권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잡혀 일본으로 왔고,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에 의해 신학교에 입학해 선교사 수업을 받았다. 당시 일본엔 약 5~10만여 명에 이르는 조선인 포로들이 있었는데, 1593년 나가사키에서 3백여 명이, 1594년엔 2천 명 이상의 조선인이 세례를 받았다. 관계 사료를 추측해볼 때 아마도 5천 명에서 1만 명 정도의 조선인 기독교도가 있었을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1610년에 십시일반 비용을 마련해 나가사키에 ‘성 로렌조’라는 이름의 조선인 성당을 건립했다. 조선인 포로라는 비참한 생활 중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빈센트 권은 이들 조선인 포로들의 고달픈 삶에 영적인 위안이 되는 지도자였다.

예수회는 일본에서의 포교 활동을 조선에까지 이어가려고 했다. 빈센트 권에게 임무가 맡겨졌다. 그는 예수회로부터 조선 전도의 특명을 받고 북경으로 파견되지만 1612,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게 된다. 지속적인 탄압 속에 배교하지 않는 교도들에게 잔혹한 박해를 가하는 상황 가운데 자선과 포교에 매진하고 있던 빈센트 권은, 시마바라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몇 차례의 고문과 회유 속에서도 굴하지 않자, 끝내 니시사카 언덕에서 화형을 당한다. 46세의 나이, 조국을 떠난 지 33년 만이었다. (KBS 역사스페셜 참조)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길

어디를 보아도 십자가를 찾기 힘든 나라 일본에, 어딜 가나 존재하는 종교시설이 있는데 바로 ‘신사’가 그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신사에 들러 소원을 빌고 출근을 하거나 등교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일어난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거룩한 피의 증거를 알기나 할까.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빈센트 권은, 일본에 살면서 신앙을 가졌고 순교했기에 분명, 일본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 피의 역사가 있는 땅인데, 곳곳이 우상 천지다.

그는 조국의 복음화를 위해 가고자 했으나 주님은 일본 땅에서 순교하도록 했다. 수백 년이 흐른 오늘, 주님은 그 피를 대한민국에 흘러가게 하셨고 부흥과 복음의 꽃을 피우도록 하셨다. 그 피가 흐르는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피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 것일까….

목숨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한 26명의 순교 성인(聖人)을 보면, 일본인이 20, 스페인인이 4, 포르투갈과 맥시코인이 각 1명이다. 일본인 성인에는 12, 13, 14세의 어린이가 3명이나 포함돼 있다. 일본을 순교의 피로 적신 이들이 있었는데, 그 땅은 그 피의 십자가가 흔적만 남아 있다.

최초 24명은 이미 교토(京都)와 호리가와(堀川) 거리에서 왼쪽 귓불이 잘린 상태였다. 당초 이들의 코와 귀를 베라는 명령을, 집행인들의 배려로 귓불만 잘려 처형당하기 위해 나가사키로 왔다고 한다. 오는 과정도 험난했는데, 오사카·교토를 출발해서 나가사키까지 도보로 1,000킬로미터를 끌려왔다. 추운 겨울, 처형자 행렬에 낀 12세 소년 ‘루도비코 이바라기’ 등 아이들의 가엾은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인솔 책임자는 ‘기독교를 버리면 살려 보내주겠노라.’고 회유했지만 아이들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사환으로 일하던 소년들은 당초 처형자 명단에서 제외됐으나 스스로 ‘순교자의 길’을 택했다. 나가사키 시민들의 동요가 두려워 외출금지 명령까지 내린 날, 4,000명이 넘는 군중이 몰려들어 순교자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특히 전설처럼 들리는 ‘루도비코 이바라기’의 마지막 모습이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내 십자가는 어디에 있나요?” 두 명의 숙부와 함께 순교한 소년은 ‘자신의 몸을 의탁할 십자가는 어디에 있느냐’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향해 뛰어갔다. ‘이바라기’는 십자가에 묶인 후에도 몸과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천국, 예수님, 마리아!”라고 말하면서 기뻐했다(나가사키의 길).

후일 26인의 유해는 ‘일본 최초의 순교자’라고 명명하여 세계 곳곳으로 보내졌다. 186268일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1950, 나가사키가 공식 순례지로 지정되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요한복음 1224절은 말씀하신다.

날마다 죽는 길

순교성지에 도착하던 날은 바람이 많이 불던 오후였다. 성지 곳곳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도대체 왜 죽어야만 했냐고 누군가는 물을지 모르겠다. 죽음과 맞바꾼 사랑, 충성과 용기의 열매가 벅차오르는 감격을 주었지만, 순교자들의 발아래 앉아 기도하면서 ‘나도 그 길을 가겠노라.’ 다짐하면서도 마냥 부끄럽기만 했다.

순간순간 정욕을 못 박지 않으면, 육성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서 우리 영혼을 잠식한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했고, 날마다 죽으라고 바울 사도도 권면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방황하고 헤맬 때에도 주님은 당신의 나라를 확장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세우신다. 때론 아골 골짝 빈들에, 때론 평안하고 안락한 환경에, 때론 고독하고 쓸쓸한 곳에, 때론 시끄럽고 번잡한 곳에. 어디에나 세워지는 그 십자가 아래 우리는 다만 나귀처럼 사용될 뿐이다. 그 어떤 곳에 보내져도 주님 뜻이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굳게 잡아야 한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단련하시고 훈련하시는 손길에 맡겨질 뿐이다. 그것이 죽음일 수도 있다.

십자가를 억지로 졌던 구레네 시몬도, 거꾸로 졌던 베드로도, 조국인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원했으나 포로로 끌려온 원수 같은 나라 일본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빈센트 권도, “내 십자가는 어디에 있나요?”를 되뇌며 12세에 주님을 위해 꽃이 되었던 ‘루도비코 이바라기’도 결국 날마다 죽었기에 목숨이라는 소유를 버리는 날, 초연하게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천국에 갔다.

성지에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성경말씀이 새겨져 있다. 예수님의 길을 가는 자들의 지침이다.

자신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것은 십자가뿐이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가는 사람만이 주님의 영광에 참여 할 수 있다.

현실의 나는 몹시도 교만하고, 고약하고, 고집이 세며 때론 이웃을 강탈하는 강도와도 같다. 그런 나를 위해 예수님이 지신 무거운 십자가는 거칠고 아프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그 십자가가 있어서 오늘도 나는 부족하나 십자가를 감당하고 있다. 점점 주님처럼, 순교자들처럼, 더 무겁고 아픈 십자가도 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만 할래요, 저건 힘들어요. 저 사람이 왜 저 십자가를 지나요? 안 어울려요. 우리 단체의 십자가가 제일 중요해요. 우리는, 나는, 저들은….

이런 아이같은 모습은 버리고,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지켜보며 ‘예. 제 십자가는 어디 있나요, 주님. 저 준비 됐어요.’ 라고 말하는 좀 착한 종이 되고 싶다. 주님이 활짝 웃으실 수 있도록, 말씀을 실천하는 지성인이 되고 싶다. 용기 있고 씩씩하게.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