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풍선

지난 합숙기간 중 발표를 하고 난 뒤 어느 전도사님께서 “와, 전도사님! 대단하네요. 이 자료 준비하느라고 굉장히 애쓰셨네요. 이러니까 예수님이 전도사님을 예뻐하시죠”라면서 칭찬을 하셨다. 사람들의 칭찬 몇 마디에 마음이 풍선마냥 잔뜩 부풀어 올랐다. 온 몸에 허영심과 교만의 독가스가 퍼져가는 것도 모른 채 사람들의 칭찬소리에 흐뭇해하며 즐기고 있었다.

풍선이 너무 부풀어 오르면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터지는 것처럼, 허파에 자만이라는 공기가 내 안에 계속 주입되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미련한 이 죄인은 사람들이 치켜세우는 말에 스스로 똑똑한 것처럼 착각을 하면서 우쭐거렸다. 그러나 이내 주님께서는 나의 그 오만방자한 허영심과 교만의 독가스를 빼내시기 위해 바늘을 살짝 갖다 대셨다. 그러자 뻥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바닥에는 여기저기 흩어진 너저분한 풍선조각만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순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듯 했다. “참으로 어리석도다! 조금만 치켜 세워주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풍선처럼 마음이 붕 뜨는구나. 너의 실상을 보아라. 요란한 소리로 주위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며 터져 버린 저 풍선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내가 밝히 말하노니 너를 주목하는 것은 나와 멀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주님 앞에서는 특별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죄인은 누군가가 조금만 치켜 세워주면 자신이 특별한 사람인 줄 착각할 때가 많다.

특별한 사람이 따로 없소

주기철 목사님은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초빙을 받고 평양으로 올라오셨다. 장로님, 권사님 할 것 없이 많은 성도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런데 목사님의 표정이 좀 굳어 계셨다. “왜 그렇게 굳은 표정을 하고 계셔요? 좀 부드러운 얼굴로 웃기도 하시고 말씀도 나누시고 그러시지요.” 목사님의 내심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목사님은 역시 당신 자신을 속이지 못하시는 분이었다.

“나는 늘 ‘주의 종’이라 지칭하며 살고 있는 목사요. 이러한 대접이 목사나 교인들이 함께 타락하도록 만드는 지름길이오. 내가 주의 종의 신분을 망각하지 않도록 교인들도 나를 도와야 하지 않겠소.” “오늘은 특별한 날 아닙니까. 너무 그렇게 두드러지게 따지지 마시지요.” “인간은 단순하고 미련한 동물이오. 치켜 주면 제가 스스로 잘난 줄 알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쭐대는 어리석은 존재요.” “그렇게 될까 두려워하신다는 것은 그만큼 약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우리 목사님이 그렇게도 약하신 분이었던가요?” “하늘 아래, 주님 앞에 특별한 사람이 따로 없소, 당신이 나를 남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부터 깨끗하게 비우시오.”

한국 땅에 믿음의 산 증인이요 위대한 순교자로서 획을 그으셨던 주 목사님은, 단 한 번도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과 달리 특별한 일을 한다고 자긍하지 않으셨다. 그저 주님의 종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셨고, 그 무엇보다도 존경받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셨다. “사람에게 존경받게 되는 것은 사탄이 쓰는 가장 달콤한 무기지요. 아마 그 유혹을 이길 장사는 몇 안 될 거요.” 호산나. 군중들이 외치는 그 소리는 쉬이 사라질 소리임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사람에게 존경받고 인정받는 자리에는 언제나 사탄의 환호성이 따라 오기 마련이기에.

하지만 때로 우리는 사탄의 달콤한 유혹을 목말라 한다. 은근히 일에 대한 대가와 칭찬의 소리를 듣기 원하고, 아무런 대가와 칭찬을 듣지 못하면 괜히 섭섭한 마음이 올라온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아닌 척 포장을 잘한다. 그리고는 마음가운데는 ‘내가 이렇게 애쓰며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드렸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네. 정말 계속 이 일을 해야 돼. 말아야 돼’라며 번민을 하며 갈등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헛된 명예욕에 순간순간 사로잡히는 우리에게 비오 사제는 “세상의 영광을 구하면 근심이 많아진다”고 말씀하신다. 뭇 사람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주님 또한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눅16:15)이라고 말씀하셨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는 곧잘 헛된 명예욕에 눈이 어두워져 좀 더 인정받고 높아지고자 아옹다옹하다가 다툼을 일으킨다. 조금만 잘하는 것 같으면, 조금만 누가 치켜 세워주면, 조금만 높은 자리에 앉으면, 조그만 아는 것 같아도 마음이 들레기도 한다. 그리고 주위에 ‘나는 이러한 사람이라고!’ 은근히 소리를 내며 다닌다.

화 있을진저 회칠한 무덤이여, 바리새인과 무엇이 다르랴!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허영과 교만의 탑을 계속 쌓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시장과 거리에 다니며 나팔을 불지 않는다고 그 어느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우리 주님은 마음의 동기와 중심을 보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겉은 허례와 위선으로 잘 포장하여도 우리 주님 앞에 드러나지 않을 것은 그 아무 것도 없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높아진들 저 천국에 그 어느 것 하나 기업으로 얻을 수 있으랴. 이 세상이 아무리 넓은들 저 천상낙원의 변두리만도 못하거늘 어찌하여 이 땅의 것을 차지 못해 괴로워하는지 참으로 가련한 인생이다. 곧 쉬이 없어질 안개와 같은, 좁디좁은 이 땅의 것을 차지하려고 서로 아옹다옹하며 할퀴며 상처를 내는지 참으로 어리석은 우리네 삶이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12:19). 우리 주님은 그 어떠한 일에도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으셨다. 아무도 길에서 그분의 소리를 듣지 못하셨다.

이와 비슷한 말씀을 우리는 여리고성을 함락할 때도 볼 수 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수6:10).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쉽게 자신이 행한 일들을 은근슬쩍 입 밖으로 낼 때가 많다. 조용히 침묵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찬양하기보다는 이곳저곳에 대화의 말꼬리 속에서 슬쩍슬쩍 흘리고 다닌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긍하며 자신을 썩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 때가 많다. 그것이 자신의 능력인양, 경건의 능력인양 착각하면서 말이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

티끌만큼이라도 자신을 주목하게 하는 것은 이미 허영과 교만의 덧에 걸려 있는 것이다. 달콤한 마귀의 손길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고 있는 것이다. 마귀는 너무나도 간사하고 교묘하여서 겸손을 가장하여 우리에게 교만의 허울을 뒤집어 씌어준다. 밝은 빛으로 우리의 마음과 행실을 밝히 비추지 않으면 깊숙이 숨겨진 우리의 자만심을 발견하기 어렵다. 설사 발견하더라도 꽁꽁 숨겨둔 채 끝까지 숨기려고 한다. 어디까지나 사람들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남으려고 하는 명예욕과 자만심이 여전히 우리의 보좌에 꽈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교만의 덧에 걸려 타락의 길로 걷지 않기 위해 오늘도 살얼음을 걷듯 조심스럽게 나아가자. 주님의 이름을 바라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될 뿐이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