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선교 보고 (3)

탄자니아의 항구 도시인 무완자에서 생선 비린내와 사람의 냄새가 섞인 여객선을 타고 세계에서 3번째 큰 호수인 빅토리아 호수를 가로 질러 5시간 반 만에 인구가 17만이나 되는 Kome 섬을 향했다. 후덥지근하고 왁자지껄한 선실 안, 체면 없이 검은 배를 내어 놓고 벌렁 자빠져 누워 자는 사람들, 선실 천장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모기 떼들 (선교단원들 이 모기 떼를 보고 앞 다투어 모기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보며 또 다른 아프리카의 맛을 느끼면서 나 혼자 의미 없는 미소를 지어 보았다. 그러나 아름답고 시원한 호수를 바라보는 즐거움 때문에 선실 안의 불쾌감은 사라지고 나도 모르는 사이 콧노래를 흘려 내었다.

섬 주변에 펼쳐진 호숫가에 백조 떼들이 날개를 쭉 뻗고 훨훨 날았다. 난생 처음 보는 흑조 떼들(백조와 똑 같고 단지 색갈이 검음)도 이 검은 대륙의 주인공인양 자신을 과시하며 더 높이 날았다가 다시 물가로 내려 앉아 물장구를 쳤다. 펠리컨은 점잖게 섬검섬검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면서 걸어 가며, 작은 새들은 서로 다투어 가며 자맥질하였다. 주위에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바나나 숲과 아침 저녁 번갈아 펼쳐지는 붉은 노을들은 절경중의 절경이었다. 이 아름다운 풍경들은 해변가에서 자란 나를 향수로 젖게 했으며, 평화로움이 깃든 이곳은 아침 저녁으로 나에게 좋은 기도의 처소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좁다란 길을 따라 섬 안으로 깊이 들어 가면서 전혀 다른 풍경들이 전개되었다. 싸우는 소리, 대낮인데도 구석에 앉아서 도박하는 사람들, 몇 개의 감자, 도마도, 과자, 몇 갑의 담배를 자판에 깔아놓고 호객하는 장사치의 소리, 거지에게 거저 주어도 신지 않을 다 떨어진 헌신발을 놓고 파는 노점상들,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소란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여기저기 모여 앉아서 웅성되는 여인들, 아무 곳에나 버린 오물들이 주위를 더럽혔다.
외지 사람들이 이 섬 마을을 가르쳐 세 가지 많은 것이 있다 하였다. ‘어부들’, 이들 대 부분은 외지에서 돈을 벌러 온 뜨내기 들이다. 남자가 있으면 항상 그 뒤를 줄지어 따르는 ‘여자’, 그리고 이들 중간에 촉매제를 하는 ‘술’이다. 내가 보기에 몇 가지가 더 있었는데 그것은 책임감 없는 욕정의 산물로서 고통 당하는 사생아들과 고아들, 버림받아 상처받은 여인들, 그리고 질병들이었다.
이 마을의 한 악의 축은 섬의 중앙에 있는 엉성하게 나무로 지은 극장 겸 bar이었다. 이 극장은 고기를 잡다가 돌아온 어부들의 휴식처이었다. 소형발전기로 돌리는 TV와 Video를 보면서 여자와 함께 술을 마신 후 밤이 깊어지면 바로 극장 밑에 있는 하루 숙박비가 2달러짜리인 여인숙으로 향한다. 엉성한 소설 같은 이 섬의 모습, 여기서도 전개되는 삶의 현장들은 마치 파도가 호숫가에 밀어 쏟아 놓은 썩은 수초와 오물과 같이 역겹다. 어찌하여 이 섬의 모습이 안팎이 그렇게 다를까? 한 섬의 아름다움과 그 섬 마을의 추한 모습은 너무나 달랐다.

무절제함 속에 태어난 섬의 생명들, 이들이 이 세상살 동안 새로이 거듭나지 않고는 축복을 누릴 수 없기에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우리는 그들이 다소나마 더 나은 사람다운 삶을 살아야 하겠기에 신앙 교육과 아울려 몇 가지 계몽 프로그램을 가져 가서 그들을 한 주간 동안 교육했다. 먼저, 평신도 사역자들이 마련한 ‘마을 지도자 세미나’였다. 이것은 1960년대 한국에서 하였던 “새마을 운동” 프로그램 비슷한 것이었다. 이 세미나 후에 그들이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 들여 “우리 섬 마을이 한 마음이 되어 야 한다. 우리 섬 마을이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 보자.” 하는 각오를 갖게 되어 고마웠다. 둘째, ‘여성 세미나’ 이었다.  한 주부로서의 임무와 사명에 대해서 가르쳤으며, 곁들여 가족계획도 가르쳤다.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하면서 한 가정에서 일곱, 여덟을 기르니 올바른 자녀 교육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한다. 그래서 적게 나아서 잘 키워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 것을 가르쳤다. 몇 명이 반발을 하였다. 피임을 하는 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곁에 듣던 현지 흑인 목사님께서 “그것은 죄악입니다.” 하고 강사를 쏘아 붙였다. 처음에는 우습게 생각이 되었고, 우리와 식견의 차이가 있다라고 생각했지만 그들 속에는 우리보다 더 순수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 셋째, 청소년들은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VBS(여름 성경학교)를 실시 했다. 시간이 갈수록 벌떼처럼 몰려 왔다. 어찌 감당할 수 없어 교실문을 닫고 진행하여야만 했고, 들어오지 못한 아이들 창문너머로 애석한 듯이 교실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마음 약한 선생님들은 그들이 안쓰러워서 훌쩍훌쩍 울어 되었다. 어린 아이들이 난생 처음 받아 보는 귀한 선물들, 재미 있는 game에 홀딱 빠져 들었다. 어린 제비 같이 한 입으로 모아 찬양하고 춤 추는 것이 보기 좋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이 프로그램이 아이들에 귀한 선물이 되었구나,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넷째, 목회자 사역자들은 배우지 못한 교회지도자들을 상대로 말씀을 가르쳤다. 그리고 천 여명이 모인 옥외 전도집회를 통해 함께 춤추면서 찬양을 할 때 큰 축제의 분위기였으며, 이 집회를 통해 많은 불신자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특이 한 사건은 집회 장소가 바로 극장과 인접한 광장이었는데, 한쪽에서 큰 소리로 유행가가 흘려 나오고 또 한 곳에서 찬양이 흘려 넘쳤다. 이 모습 마치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과 싸움 같았다. 물론 참신이신 하나님께서 승리하셨다. 우리 집회할 동안 3일 동안 그들은 문을 닫고 말았다.
그들에게 많은 것을 안겨 주고 싶은 마음으로 모기와 벌레에게 물리는 것, 입에 맞지 않는 변변치 않는 음식을 개의치 않고 짧은 기간에 최선을 다했다. 우리들에게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이렇게 사역을 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가 나왔다.

우리는 가르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더 도움을 주어야 하겠다는 사랑의 음성들이 단원들 사이에서 나왔다. 우물을 파서 좋은 물을 제공하여 병을 예방하고, 간단한 진료소를 만들어서 그들을 치료하고, 허구한 날 할 일 없이 빈둥대는 그들에게 쉼터인 마을 회관을 지어서 그들을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고, 교회를 통해 영적인 안내를 받게 하며,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위해 고아원 건립 등 마을 자립을 위해 여러 가지 계획을 해 보았다. 어떤 뜻있는 분은 앞으로 그곳에 장기 선교사로 와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이 일에 앞장 서겠다고 하는 은혜로운 모습이었다. 이런 계획들이 많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고 기도했다.

나는 이 섬의 모습을 볼 때 이것이 우리의 인생의 현주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현대인들은 그런대로 외모를 지성, 체면, 치장 등으로 아름답게 잘 겉치레하여 꾸며낸다. 조개와 같이 두껍게, 빽빽이. 단단하게 자신을 잘 포장하여 덮어 놓는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교만, 난폭함, 시기, 음란, 부정직 등 더러움과 추함이 들어 있지 않는가? 때로는 이것들이 뿜어져 나와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처럼 추한 한 인생을 펼쳐내고 있지 않는가? 또한 하루에 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지낸다. 그 중에 얼마나 많은 건전한 생각들을 할까? 대 다수가 부정적인, 죄된 생각이라고 한다.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이다. 우리를 정결한 신부로 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기를. “어찌하여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있겠느냐?” (약3:12) 곧 우리는 항상 안팎을 선함과 정직함과, 정결함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행동을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자신의 영혼, 곧 영생까지도 책임져야 한다 라고 말씀을 하신다. 어떻게 하겠는가? 더럽고, 추한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설 것인가? 우리는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와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며 그 분 앞에 엎드려야 한다. 예수님의 피 한 방울이 우리의 안팎을 정결케 하여 우리로 그의 아름다운 신부가 되게 하시리라.
주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