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게 하소서

밤새 끝없는 바다와 구름 위를 지나 태평양 바다를 건너가는 비행기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 흘리며 이 글을 적어봅니다(2009. 4월 미국행 비행기).

매일 매순간 현존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진정한 삶은 현존하시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사귐에 있다. 주님의 임재 안에 있을 때 참 만족이 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첫 순간에 “하나님은 여기 계신다. 나와 함께!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드려야 한다. 주님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나 바보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밤에는 잠을 자기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깨어나서도 그분을 생각하지 않고 망각 속에서 그냥 시간을 보내게 된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롬13:11).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깨어있다는 말은 ‘그분의 삶을 산다’는 뜻이다.

주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하시는 것처럼 행하고, 고통 받으신 것처럼 고통 받는 것이다. 이 세상 명예나 권세, 부귀, 영화는 오히려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며 영적 졸음에 빠지게 한다. 이러한 것들은 위험물, 즉 장애물로 여기며 예수님과 함께 고통, 멸시, 천대, 굴욕 받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른 아침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 보이시면 이것을 잘 보존하고 하루 동안 잘 가꾸어야 한다. 그러면 여러 가지 일에 부딪치게 되더라도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평화할 때나, 싸울 때나, 단 것이나, 쓴 것, 실패할 때나, 성공할 때나, 일할 때나, 쉴 때 하나님이 보내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 안에 잠기게 하여 그분 안에서 한 결 같이 머무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을 할 수는 없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소유하면 다른 아쉬움은 모두 쉽게 견디어 낸다. 성인들은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고 나는 그분 안에 있다”(요14:20)는 경험 속에 살아가신다. 그것은 너무도 행복하기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피조물이 나에게서 떠나갔다 하더라도 결코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게서 모든 것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비록 값지게 생각되는 것이더라도 그 자체에 애착을 두지 않을 때, 우리 마음은 더욱 더 하나님과 일치하게 되어 넘치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은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가! 모든 피조물은 포기하고 없는 것처럼 초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없다. 만일 어떤 영혼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그 사람이 곁에 없는 것에 계속해서 한탄한다면, 그 영혼은 아직도 하나님을 올바르게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아 떠나자
오로지 하나님만을 발견한 자는 피조물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속에 늘 영적인 감미로움에 대한 갈증이 있음으로, 어떠한 피조물에서도 만족할 수가 없다. “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는 결코 당신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성인성녀들이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물기 위해 모든 피조물과의 교제를 끊고 고독한 삶을 살았는지!
나의 선생님은 하나님만을 사랑하시기 위해 철저한 고독의 삶을 사셨다. 그것이 얼마나 값지면 “고독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라고 하셨을까. 이집트의 통회녀 마리아는 자신의 조물주 하나님만을 찾아 얻기 위하여 모든 피조물을 끊고, 기억 속에서 조차 잊어버리기 위해 외롭고 황량한 사막에서 47년간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온전히 이탈하여 유일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
베네딕또는 스비아꼬 산속으로 홀로 들어가 온갖 유혹과 싸우며 결국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다. 안토니오 성인 역시 사막의 은수자로 일생을 사시면서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셨다. 주님을 차지하기 위해 마귀와 세상과 역경을 싸워 이기신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갖가지 고통을 주시면서 모든 피조물로부터 멀리 떼어 놓으신다. 내외적으로 많은 연단을 받으며 홀로 변함없이 지고하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에도 애착하지 말고,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수많은 운하(運河)와도 같다. 이 운하를 통해 많은 물이 지나가고 선박들의 왕래가 가능하듯 주님께서는 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총과 빛을 보내시고자 하신다.
우리는 거대한 도시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골방에 들어가 피조물로부터 떠나서 가장 외진 사막에서처럼, 오로지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하게 지내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피조물에 애착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만이 전부이고 하나님만을 어디에서나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분들에게 장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만일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세속의 친구 때문에 슬퍼한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당신 한 분만이 나에게는 충분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다.

어떠한 것에도 자유로운 이탈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이 언제나 생생하고 효과적이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로부터 이탈하여 살도록 힘쓰자. 필요하다면 피조물에 대한 추억까지도 버리자. 모든 피조물들을 포기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완전히 소유하고 맛 들일 수가 없다. 하나님 자신이 가끔 여러 가지 손실이나 질병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멀어지도록 해주신다. 가까운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을 때 우리는 곤경에 처하게 되고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과 불행이 하나님을 확실히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이고, 길임을 모르고 있다. 우리가 피조물로부터 멀어지고 떠나게 되면 될수록 그분은 우리에게 더욱 더 가까이 계신다. 어떠한 피조물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떠한 일에도 참견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의 법규에만 몰두하는 영혼은 마음에 고유함을 깨뜨리지 않는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 목사님은 그 바쁜 중에도 하나님과의 현존을 15분 이상 잊어본 적이 없다고 하신다. 소화 테레사 성녀는 3초 이상 주님 현존을 잊지 않기 위해 언제나 주님만을 사랑하셨다. 나의 선생님도 그 혹독한 육체적 시련 속에서도 매순간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의지하거나 바라지 않으시는 철저한 모습을 보여 주셨다.
이러한 분들은 하나님 안에서 쉬는 것보다 하나님 자체를 더욱 좋아한다. 하나님의 달콤한 평화에 아주 감동되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자의나 혹은 감각적인 즐거움으로 하지 않았고, 외적인 일들이 그분들을 유혹할 수 없게 하였다.
자신 안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말하거나 듣거나 먹는 것과 변화무쌍한 것들을 보는 것도 때로는 짐스럽기만 하다. 그분의 보화가 있는 내면으로 그의 생각과 마음이 쏠리게 된다. 모든 것을 떠나서 더욱 더 진정으로 그리고 경외심에 찬 마음으로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머물고 싶어 한다. 그 강한 열망은 때때로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고 싶은 충동을 마음속에 생생하게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는 내 영혼이 가끔 하나님의 현존을 잊어버리고, 오관의 창문을 통해 피조물 가운데 떠돌아다니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영혼이 하나님 안에만 머물러 있도록 우리는 오관의 창문을 닫아두어야 한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다”(빌3:20). 하늘의 시민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천국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안에 살아야 한다. 그분을 관상(觀想)하기 위하여 우리는 창조되었다. “나의 하나님! 제가 당신만을 위하여 살고 당신에게만 몰두하도록, 세상에 있어서 죽은 자 되도록, 은총을 내려 주시옵소서!”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