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로만


언젠가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이 몸이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 당신이 그리워 목이 탑니다. 언제나 임계신데 이르러 당신의 얼굴을 뵈오리이까?”라고 고백하며 주님 사랑에 목말라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또 학부 4년을 마치면서 마지막 때의 빛을 증거하는 사명자로 살아보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신자가 되기를 열렬히 원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기는 자취를 감추고, 무디어진 내 모습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러다가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는 삭막해진 나의 내면을 보게 하셨다. 주님께 너무 죄송했고 몹시도 부끄러웠다. 얼마 전에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평생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 하십시오.”라는 말씀도 마음을 강하게 울렸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사랑만 받은 것 같다. “나는 너를 가르쳐 네 갈 길을 배우게 하고 눈여겨보며 이끌어 주리라”(시32:8).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어 친히 속죄 제물이 되어주시고 난공불락의 진리를 알게 해 주셨고, 믿음의 길을 걷게 하셨다. 평생 갚을 수도 없고, 잊어서는 안 될 너무나도 과분한 사랑을 입었다.
그런데도 무엇이 부족해서 내 마음이 삭막해졌을까? 어느 날 설거지를 하다가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육신의 양식을 먹고 나서는 꼬박꼬박 설거지를 하였지만, 마음과 행실을 닦는 회개생활이 너무나 나태했음을. 그리고 내 안에 주님을 사랑하기 위한 애태우는 마음이 없었던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말만 앞섰을 뿐 하나님과 관계도 이웃과의 관계도 너무나 소원했다.
주님은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노아와 같이 절제와 경건으로 수도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찾으실 텐데, 여전히 부족함 뿐이다. 더 철저히 깨어서 살아야 할 사순절을 정욕과 어깨동무를 나란히 하고 지낸 듯하다. 간식을 엄격히 절제하기는커녕 한 밤중에 라면이 먹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새벽기도 때에도 엎드려 잠들기가 일쑤였다. 이웃에 대해 사소한 말 한마디도 포용하지 못하고 판단이 앞섰다. 사랑으로 덮어야 할 일인 줄 알지만, 괜히 심술이 나고 심기가 불편해 졌다. 예전에는 친구가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고 섭섭하게 대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사소한 일로 연락이 끊어진 친구가 조금 얄미워졌다.
더구나 성도의 호흡과 생명과도 같은 말씀을 지키는 게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너무 어려웠다. 악습도 끊으려고 싸워보았지만, 번번이 실패를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진 것 같고 광야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생각이 문득문득 스쳐지나갔다. 누군가의 위로를 받고 싶어 내 속마음을 열어놓고 진지하게 얘기도 해 보고 싶었다.
때로는 필요한 것이 있어도 소유를 버리게 하는 훈련을 시키시는지 주님은 응답도 안 해주신다. 주님은 철저히 고독과 싸우며 고독을 사랑하라 하신다. 그런데 고독과의 싸움이 너무나도 힘이 든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믿음과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영적투쟁도 느슨해지고, 영적감각도 둔감해져버렸다. 먹고 싶은 욕망, 편안하게 쉬고 싶은 욕망, 조금만 더 자고 싶은 욕망 등 모든 정과 욕심을 철저히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데,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할 때가 참으로 많다.
저의 믿음의 스승은 “고독은 축복입니다. 고독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라는 권고의 말씀을 하셨다. 돌아보면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주님을 향한 애태움을 가지며 주님을 더 깊이 만나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조용히 나에게 다가오셨다. 아무리 작은 죄라고 느껴지는 것도, 아무리 작은 고난이라고 느껴지는 것도 가볍게 생각지 말라고. 모든 이를 어떤 환경과 조건에 매이지 않고 무조건 사랑하라고.
온갖 조롱과 핍박과 모욕 속에서도 입 한번 열지 않으셨던 예수님, 아들의 고통을 묵묵히 바라보시며 참아내셨던 성모님, 지극히 작은 죄에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듯이 탄식을 하시면서 철저한 회개의 삶을 사셨던 선생님을 생각하니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품지 못한 너무나도 옹졸한 나의 모습에 하염없는 통회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또한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은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가 임할 때 영혼이 힘을 얻을 수 있고, 소생할 수 있음을 보게 되었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처럼,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이 계시므로 내가 존재할 수 있고, 주님이 계시므로 이 광야의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 갈수 있다는 것을.
오래간만에 바쁘고 힘들고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었던 친구 집에도 과일과 간식을 조금 만들어서 찾아갔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주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친구가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기도를 하고 나서 집에 돌아오는데 큰 빚을 갚고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줄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리고 나의 모든 형편과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아픔과 고난이 참 감사했다.
김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