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말씀하시면

누가 말이라도 건네면, “저 바쁘거던요. 저 시간 없어요.”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이건 저렇고 저건 저렇고 해서 어려울 것 같아요.”라고 부드럽게 사양할 수도 있는데, 무조건 못하겠다는 말부터 나온다. 한 전도사님이 저녁 기도가 끝난 후 “전도사님, PPT 작업한 것 중에 글씨가 선명하게 안 드러나는 게 있어요. 바탕 화면과 색깔 바꾸어야 할 것 같은데요. 지난번에 화면에 나오지 않은 것도 바꿔야 할 것 같고요.” “아, 그건 바꿨어요. 나머지는 그냥 하지요.” 얼굴에 짜증이 잔뜩 섞인 얼굴로 투명스럽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고 교회에서 집회가 있어서 6시에 출발한다고 친절하게 전도사님이 가르쳐 주시는데도 “저 오늘 못 갈 것 같아요.”라고 하면서 단칼에 잘라버렸다. 이내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 담기에는 벌써 찬바람이 쌩하고 지나간 후였다.

전도사님께도 예수님께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왜, 이렇게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일까. ‘예수님 죄송합니다. 도와주세요. 알베리오네 사제가 말씀하신 것처럼 1시간이지만, 10시간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지혜를 주세요.’라고 화살기도를 드려보지만, 여전히 마음은 산란하다. 어떤 전도사님이 자그마한 일을 부탁하는데도, ‘아휴! 내가 그것까지 해야 돼.’하는 생각에 얄미운 마음도 생긴다. 마음이 분주하고 복잡하니까 염려병도 다시 재발했다. 나의 가장 큰 약점, 투덜이 스머프도 다시 등장했다.
이러한 부덕한 모습을 자꾸만 보이니까 어느 전도사님이 “잠이라도 줄여서 하세요.”라고 말씀하신다.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잠이라도 줄여서 해야 하는데…’ 하지만 평소의 영적 실력이 있는지라, 이내 그것도 잠시뿐 피곤한 몸을 쉬어주어야 한다면서 새벽예배 드리고, 아침 식사 때까지 이불속을 뒹굴었다.

이후 아침밥을 먹고 로마서 교정 마무리를 하려고 컴퓨터를 켰다. 글을 읽어 내려가는데 한 제자에게 답변을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이 마음을 찌른다. “현재 이 모든 환경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만물도, 특히 고난 자체가 좋은 것이지요.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다고 믿으니까 좋고요. 또 모든 시험들은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시는 거니까 좋은 거고요. 고난 자체를 귀하게 여기니까요. 나쁜 것도 다 좋은 거고, 좋은 것도 다 좋은 거고요. 그러니까 미워하고 귀찮아 할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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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성도 늘 부족하고 미워하고 귀찮아하고 짜증내고 엄살 부리고 투정부렸던 내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 늘 투정만 부리고 살아가니 죄송한 마음에 가슴이 아리다. ‘아이, 이 못난아! 언제 정신 좀 차릴래. 얼굴이 못생겨서 못난이가 아니라, 마음이 울퉁불퉁하니까 못난이지. 아이, 이 투덜아! 언제 그 못된 버릇 고칠래. 언제까지 투정 버리고 엄살 부리며 살아갈래. 감사할 수 없을 때 감사하는 게 참 감사가 아니냐. 잠 잘 것 다 자고, 쉴 때 다 쉬고, 먹을 것 다 먹고 하면서 언제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냐?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그게 종의 자세가 아니냐? 손해 볼 각오를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각오를 하고 살아가야 되지 않겠냐? 언제까지 그렇게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지 못하고 살아가겠느냐?’

“힘들다고 엄살 부리지 마세요.” “말씀 가운데 최선을 다하면 하늘에서 상급이 클 것입니다.”라는 선생님의 교훈이 귓전을 계속 때린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건만, 오늘도 투정만 더 늘어가는 나의 모습을 예수님의 보혈로 갈아엎고 싶다. 늘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이 명하시는 데로, 이웃이 부탁하는 일들을 귀찮아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분주한 마음을 다 내려놓고, 주님께 나아가고 싶다. 주님 곁에 머물고 싶다. 비록 그곳에 숱한 고통과 고난이 따를지라도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언제나 주님 품으로 뛰어들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싶다. 모든 시작과 끝을 주님 안에서 빛 가운데 행하면 얼마나 좋으랴.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