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


어린 시절 친구, 누렁이
어릴 적 시골집에 누렁이가 생각난다. 누렁이는 큰 눈을 껌뻑거리며 어린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도 가만히 있었다. 풀을 한줌 입에 넣어 주면 혀를 내밀어 내 손등을 핥아 주었다.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 대신 소죽 쑤는 일이 내 일과였다. 저녁 무렵 여물을 썰어 소죽을 끓이기 위해 큰 집 작은 집 다니면서 구정물을 모아 소죽을 끓여 누렁이에게 주었다. 겨울이면 외양간 곁에서 찬바람 들지 않도록 가마니로 막아주기도 하였다. 눈이 올 땐 자다가 일어나 외양간을 쳐다보기도 했다. 소는 가난한 우리 집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어린 나에게는 좋은 친구였다.
누렁이는 일을 참 잘했다. 밭가는 일, 달구지 끄는 일,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서로 먼저 데려다가 일을 시키려고 날을 잡아야 했다. 누렁이가 송아지를 낳을 때면, 누렁이 옆에 가지 못하게 했다. 송아지가 보고 싶어 외양간 곁으로 몰래가서 보면 어린 송아지는 엄마 젖을 앙팡지게 먹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3학년 때, 작은 누나와 풀을 베다 작두에 내 오른손가락 4개가 잘리게 되었다. 놀란 누나는 어떻게 할 줄 몰라 수건으로 네 손을 둘둘 감아 주었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산 너머 일하시는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나는 피가 계속 떨어지는 손을 붙잡고 울고만 있었다. 그런데 한 시간 두 시간이 되어도 누나는 오질 않았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 누렁이만 있었다. 누렁이는 아까부터 큰 소리로 음매 음매 하고 울면서 계속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누나와 달려와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냐?”하시며 밤중에 읍내 보건소까지 걸어갔다. 캄캄한 밤길을 걸어 보건소에 갔는데 보건소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업무시간이 훨씬 넘은 밤 9시였다. 아버지는 의사선생님께 통사정을 하셨다. 의사선생님은 못마땅하신 표정을 하시면서 수건을 풀어보셨다. “이래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시면서 가위로 막 잘라내려고 하신다. 나는 무서워서 울고 아버지와 누나는 그래도 자르지 말고, 그냥 한번 붙여나 보자고 또 사정을 하신다. 소용없다고 하시면서 큰 바늘로 꿰매는데, 나는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양쪽에서 붙잡고 손가락 중간마디를 듬성듬성 꿰매어 주었다.
다음날 속이 상하신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오셔서 작두를 부숴버리고 소를 팔아버리겠다고 하셨다. “가난이 원수야. 저 어린 자식 손을 저렇게 해놨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꼬?” 하시며 한탄을 하셨다. 우리 집은 암흑시대였다. 다행히 소를 팔지는 않았다. 그런데 두 달 후 네 손가락이 기적과 같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해 드렸다. 나는 그날 돼지 갈비를 처음 먹어 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외양간에 있는 누렁이를 보니 많이 수척해 보였다. “누렁아, 잘 있었어. 나는 이제 괴안타.” 다 나은 오른손으로 머리를 쓸어주니까 누렁이는 내 말을 알아듣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눈만 껌뻑거렸다.
그 이후 누렁이는 우리 가족처럼 함께 살면서 많은 일을 해주었다. 송아지를 매년마다 낳아주어 그 송아지를 팔아 학비도 내고, 누나 시집갈 때 쓰기도 했다. 소는 큰 덩치에 비해 참 순하고 우직하고 성실하다. 그리고 주인 말을 참 잘 따른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믿음
구약 성경 사무엘상 6장에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의 법궤를 실은 마차를 보내면서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을 우연한 사건으로 무마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일부러 아직 한 번도 멍에를 메 보지 않은 두 암소를 선정한다. 그것도 젖 먹는 송아지가 있는 어미 소를. 그들은 두 암소에게 멍에를 씌우고 젖먹이 송아지를 억지로 떼어놓았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까지 가게 했다.
그런데 두 암소는 뒤에서 울어대는 어린 송아지 울음소리에 한 번도 뒤돌아서지 않았다. 두 암소는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 길로 곧장 나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참으로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일은 사람이 가히 측량할 수가 없다.
두 암소는 벧세메스에 도착하자 끌고 온 수레를 장작삼아 그 위에 번제물로 드려진다. 벧세메스로 가는 말 못하는 두 암소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사건이었다.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신 분들이 계시다. 쟌느 샹달은 28세 때 갑자기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젊은 과부가 되어 세 아들을 데리고 살았다. 어느 날 성 프랑소아드 살 설교에 큰 감동을 받고 주님을 위해 살기로 결단을 하였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무(無)로 여겨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일평생을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에 전념하려고 하였다. 그때 늙은 아버지는 매우 슬퍼했고, 세 아들은 강경하게 반대를 하였다. 그런데도 쟌느 샹달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이들은 울면서 “어머니 다시 한 번 우리를 생각해 주세요. 어머니 없이 우리는 못 살아요”하고 애원을 했다. 울며 붙드는 아이들의 그 모습을 보자 차마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자 한 수사님이 “이만한 일에 주저하시면 앞으로 어떻게 주님의 뒤를 따르겠소?”라고 하였다. 그때 쟌느 샹달은 “네, 압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들의 엄마가 아닙니까?”라면서 잠시 기도를 하였다. 막둥이는 문턱에 누워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으며 가로 막았다.
기도를 마친 그녀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주님을 생각하였다. 눈물을 머금고 막둥이의 허리를 넘어 집을 떠나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실천하는 지성인이었다. 그 후 그녀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앞에서 ‘무’(無)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도 나라들도 모든 사람들도 다 ‘무’다”라고 고백하셨다. 그녀는 기도와 사랑실천을 활발하게 하셨다. 각 가정을 방문하여 병자와 불쌍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며 사시다가 거룩한 성녀가 되셨다.

쟁기를 손에 잡은 사람들
귀족이었던 잔느 귀용 부인도 28세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자 많은 재산을 교회에 다 희사하였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그리고 자신의 자아를 철저히 깨뜨리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철저한 경건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그녀에게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폭포수’와 같은 큰 은총을 부어 주셨다. 그녀는 기도에 더 깊이 심취하게 되었고, 오직 예수님 외에는 다른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은혜가 많은 곳에 마귀의 역사도 강했다. 세상의 온갖 비난과 오해와 핍박이 있었다. 나중에 그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에 갇혀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런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나는 나를 묶어 놓은 쇠사슬을 사랑합니다. 인내는 내 것이 아니라 나의 생명이신 그분의 것입니다.”라고 고백을 하셨다. 그녀는 마귀와 세상과 역경을 피 흘리기까지 싸워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하신 위대한 성녀였다. 잔느 귀용에게는 오직 하나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뿐이었다. 7년의 긴 바스티유 감옥생활 속에서도 그녀의 불굴의 신앙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심장이 뛸 때 마다 주님을 사랑했다. “나는 자고 있으나, 나의 심장은 깨어 있습니다.”
또 한 분은 20여 년을 한결같이 살아가는 권사님이 계시다.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버렸다. 어린 세 자녀를 데리고 손수레를 끌면서 장사를 하고 박스를 주었다. 추운 천막집에서 판잣집으로 온갖 고생 다하면서 자녀들을 길렀다.
권사님은 밤이면 성전에 나와 목이 메도록 울며 기도하시다가 그대로 주무셨다. 새벽예배를 마치면 그 추운 날에도 박스를 주워 다가 팔아 가장 먼저 하나님께 헌금을 하셨다. 그러한 권사님은 세 자녀를 대학에 보내어 딸을 공군 대위로, 아들들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여자 제 3수도회에 들어가 잔느 귀용처럼 예수를 닮아보시겠다고 수도생활에 전념하고 계신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62). 이와 같이 손에 쟁기를 잡고 좁고 협착한 길을 걸으며 앞으로 전진 하셨던 믿음의 용사들이 우리 곁에 계시다.
“밝은 빛 가운데 최선을 다하면 하늘에서 상급이 클 것입니다.” 강직성 척추염으로 40평생을 병상에 누워 살아가면서도 늘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셨던 선생님의 음성이 가슴에 깊이 울린다. 2009년 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설렘 속에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처럼 심장이 뛸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정진하자. 우직한 소처럼 눈보라가 몰아쳐도 앞으로 전진 하자. 최후에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그날까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5-8).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