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의 도는 기독교 핵심진리이며 바울 신학의 초점이다. 성경은 바울 신학의 초점인 십자가의 도가 모든 성도들에게 확실한 신앙고백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모든 성도가 담대하게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하였고, 로마서 6장 6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요”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 중에 옛사람은 육적인 애정(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과 욕망(식욕, 성욕, 물욕, 수면욕, 명예욕)과 죄의 본성에 얽매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 즉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는 사람 자체가 못 박혔다고 고백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범죄하기 쉬운 기회가 생길 때마다 혈기와 질투, 음욕과 교만 등이 마음과 행실 가운데 나타남으로 옛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6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하면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현재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것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날마다 죽음에 넘기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옛사람의 죽음에 대한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면 ‘마지막 아담’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매우 중요한 뜻을 담고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의미하는데, 이 단어를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과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먼저 창조론을 참조해 보자.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어 에덴낙원에서 살게 하셨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한 결과로 에덴낙원에서 추방당하고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인간의 육체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심령 속에는 마귀적인 성질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귀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고 범죄케 함으로써 지옥백성이 되도록 갖은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아담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고 계시다. 아담 한 사람 안에 모든 피조물을 부속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한 개인의 이름이 될 뿐만 아니라 우주와 만물, 또한 인간의 육체와 성격, 즉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는 이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하고 저주받자 모든 피조물들이 비참한 운명에 빠진, 무가치하고 불행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아담 안에서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을 예수님 안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신 것이다. 저주받은 모든 피조물들을 담으신 ‘마지막 아담’ 즉 예수님께서 33년 동안 사시다가 그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그 안에 담겨진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옛사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 생활 가운데서는 죽지 않고 여러 가지 죄가 나타나지만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이미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되는 것이다. 물론 억지로 믿어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자연스럽게 믿을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재창조

성도들의 옛사람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제거됨을 알았다. 그런데 아담 안에서 창조된 모든 것들이 아담 안에서 끝났다면 성도들의 믿음은 무익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기에 큰 복이 있으니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모든 피조물을 포괄적으로 담으셨던 것들을 새롭게 창조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영혼들은 영생복락을 누리는 데 필요한 새생명과 부활체 즉 신령한 몸과 거룩한 성품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확보하여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10절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예수님의 부활 안에 모든 성도들의 부활이 함께함을 증거해 주고 있다.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짐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재창조된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성품인데 그것은 죄를 범하려야 범할 수 없는 거룩한 성품이다. 선만 행할 수 있는 이러한 성품들은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거룩한 성품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생명 안에 새로운 성품이 들어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난 후에 영원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모든 성도들은 광야 연단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즉 출애굽(예수님 영접)한 모든 성도들은 누구든지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 그러나 성령님이 영 속에 거하지 않는 한 생명 역할을 하실 수 없다. 성령께서 생명 역할을 하게 하시려면 광야 연단 과정을 마치고 영적할례를 받은 다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성령께서 생명 역할을 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계속적인 생명의 능력을 힘입어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눈에 보이거나 잡히는 것이 아니지만 영적할례를 받은 성도는 생명이 영 속에 내주하심으로써 체험적으로 알 수 있다.

십자가의 주관적인 역사

이와 같이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마지막 아담’ 안에 있는 죽음의 은총을 순간순간 공급받음으로써 옛사람은 깨어지고 마음과 행실은 점진적으로 정결해져 가는 것이다. 십자가의 준비된 은혜를 순간순간 공급받으면서, 언제나 열심히 순종하며 자아를 깨뜨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회개하는 생활을 계속하게 되면 예수님의 생명을 담을 수 있는 정결한 그릇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도를 중심으로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이 구원받고 성화되게 하심으로써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풍성한 기업을 누리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여 확실한 천국 소망과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밝은 빛 좁은 길로 경주해야 한다. 또한 마귀와 세상, 거칠고 사나운 환경이 유혹하고 방해할지라도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피할 길을 주시면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붙잡고 정진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