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청빈이여

bfb5bcbac8c6b7c311.jpg존경받는 분들은 청빈한 삶을 사시는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경배 받으실 예수님은 가장 가난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8:20).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류에게 청빈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종교적 덕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청빈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짐승 우리의 구유라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30년 동안 목수로 중노동을 하여 손마디가 굵은 그분은 피곤한 육체 노동자였습니다. 그렇게 일평생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제자들과 같이 다니실 때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벌 옷도 입지 말라.”(6:7-13)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잡수시는 음식이나 입으신 옷이나 만사가 가난하셨습니다. 임종하기 직전에는 입고 계시던 속옷마저 제비 뽑아 벌거벗기고 시체 장례는 수의도 무덤도 남의 것을 빌려서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활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가난한 삶만큼 나를 감동시킨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그 가난한 삶이 나를 울게 했습니다. 그래서 눈 쌓인 삼각산으로 갈멜산으로 밤새 울며 기도하다가 눈 속에 파묻혀 새벽에 내려올 때면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며 내려왔습니다. 집에서 쫓겨나고, 교회에서도 미쳤다고 쫓아내고, 오고 갈 데 없어 산으로 들로 다니며 산숙하며 노숙할 때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학교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개봉동 지하실 다섯 평 남짓한 남의 개척교회에서 노숙자처럼 살았습니다. 교회 맨 뒤 의자에서 자고, 먹고,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무소유의 삶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내게는 예수님이 삶의 전부이니까요. 그렇게 살아오다 지금은 내 수도실이 있고, 커다란 수련원이 나와 전혀 상관없이 내 이름으로 올라와 있고, 교회도 이것저것 나의 소유처럼 붙어 있습니다. 그런 소유에 대해서 티끌만큼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도 왠지 불편하고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아 부담스럽습니다.

청빈한 생활만큼 성화와 복음적 감화를 주는 것이 없습니다. 청빈은 종교적 모든 미덕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는 덕입니다. 모든 선한 덕, 꿈의 여왕이요, 존재해야 할 선덕의 귀부인이요, 청빈은 모든 덕의 완전이며 동시에 모든 덕의 지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레사 성녀는 청빈은 많은 선덕을 잉태한다.”고 했습니다. 청빈과 단순함은 우리 영혼 안에 하나님이 채워주실 빈자리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청빈은 교만과 음란을 죽이고 성화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청빈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세상도 우리를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귀부인인 청빈과 함께 있다면 세상은 우리를 길러줄 것입니다.

요즘 많이 반성하게 됩니다. 내가 너무 사치하고 있다는 생각에 주님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천국을 얻고 싶은가?” 그렇다면 비천한 청빈을 끌어안으십시오. 소유하면 피곤해지고, 사랑하면 더렵혀지고 잃으면 번뇌케 되는 썩어질 재물의 뒤를 좇지 않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현대교회의 번민들, 점점 더 사치하고 많은 돈 들여 호화로운 거대한 교회 건물 짓는 일을 그만하고 나사렛 예수님의 청빈정신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바울 사도와 프랜시스 성인처럼, 무명의 스승처럼, 이용도 목사님처럼 청빈한 삶을 사신 분들이 완덕에 경지에 이르셨고 존경받는 분들입니다. 전라도 남원 동광원 김금난 원장님을 만나면 언제나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님을 말씀하십니다. 벌써 20년 넘게 수십 번도 더 들었던 말씀인데, 듣고 또 들어도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어 눈물을 흘리며 내려옵니다. 분도 요셉 라브르 성인을 성경책 속에 꽂아 놓고 그렇게 살겠다고 흉내도 많이 내보았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은 종자가 달랐습니다. 어림도 없었습니다. 분도 요셉 라브르 성인은 청빈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분명 대성자입니다.

!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나는 왜 저렇게 살지 못할까? 눈보라 치는 산야를 가슴 풀어 제치고 오소서 내 주여 오소서, 내 주여 나 주님을 갈망합니다.” 그렇게 가슴 터지도록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데, 주님만 부르다 피를 토하여 쓰러질지라도 주님 한 분 사랑하며 사는 것이 나의 일생 소원인데 왜 그것이 마음처럼 안 될까요.

인류 역사는 부를 소유하려는 탐욕의 역사라고 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모든 불행과 화가 오고, 종교는 청빈의 정신으로 맞섭니다. 이 정신에 철저해야 종교는 살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돈에 대한 속담들이 있습니다.

몸은 마음에 의지하고 마음은 지갑을 의지한다. 돈이 소리를 내면 울음이 그쳐진다. 돈으로 행복은 살수 없지만 행복을 불러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죽을 때까지 돈이 쌓이지 않는다. 집안에 돈이 있으면 집안에 평화가 있다. 인간의 동물과 다른 점은 돈 걱정을 한다는 것이다. 돈 걱정을 하는 동물은 하나도 없다. 랍비가 길거리에 서 설교하는 것을 보라. 10불씩 준다면 더 인기가 좋다. 좋은 수입보다 더 좋은 삶은 없다. 돈은 어떤 문제도 열수 있는 황금열쇠다. 부자가 되는 것이 있다. 내일 할 일을 오늘 하고 오늘 먹은 것은 내일 벌면 된다. 돈을 빌릴 때 웃으면 돈 때문에 울게 된다. 명의도 가난한 사람만 못 고치고 다 고칠 수 있다. 돈 때문에 어느 사람이 물에 빠져서 노도 같은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람을 구해주었다. 사람들이 그 용감한 사람에게 박수를 치며 어떻게 그 위험을 무릅쓰고 저 사람을 구할 수 있었느냐고 물을 때 저 사람이 내게 갚을 돈이 많거든요. 돈을 받으려고 용감하였던 것입니다. 부유해가는 교회는 종교가 아니다. 그건 종교가 죽는 길이다. 그리고 인간생활을 죽이는 것이다. 종교의 길은 청빈의 길이다.

웨슬리 목사님이 88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입던 옷, 보던 책, 사용하던 식기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돌아 가셨을 때 온 세상이 그분을 존경했습니다. 매스컴에서 가장 부각시킨 것은 무소유의 삶이었습니다. 최춘선 목사님의 영상을 네 번이나 봤습니다. 그 추운 날, 맨발로 전철역 근처에서 복음을 전하시던 그 모습을 보면서 엉엉 울었습니다.

나는 돌팔이 수도사 기생충 같은 인생입니다. 나는 왜 저렇게 못살까. 성경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사람은 구약의 모세 선지자와 신약의 바울 사도입니다. 이분들은 전혀 물질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분들입니다.

우리의 거울이요 모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권력을 이용하여 평생 써보지도 못할 돈을 축적했다가 패가망신 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도 그런 분이 계셔서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왜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려 하는지, 탈무드에서 말하듯 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더 잘 되는데 말입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주님을 바라보면서 불 꺼진 기도실에 불을 켜고 조용히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 거룩하신 주님, 나 무슨 말로 주님께 다 감사드리랴. 끝없는 주의 사랑 한 없이 고마워, 보잘 것 없는 저를 주의 것 삼은 주님만 사랑하며 나 살게 하소서.

클레르보 버나드 성인이 지으신 찬양을 부르며 그 거룩하시고 청빈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도 바울과 프랜시스 성인과 분도 라브르 성인과 선생님, 웨슬리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최춘선 목사님 같은 거룩하신 분들을 기억하며, 참으로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그리운 분들을 기억합니다. 이 새벽, 거룩한 삶, 청빈한 수도자가 되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