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봐 주세요

뒷모습 증후군(Childs Back Syndrome)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과도한 교육열로 가족과 함께 있을 시간이 부족해 아이의 얼굴보다 뒷모습이 더 익숙해진 사회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아이들은 학교나 학원, 어른 세대는 직장이나 기타 일과로 바쁘다 보니 서로의 뒷모습만 보는 시대가 되었다. 마주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각자 바쁘다보니 가족들이 둘러 앉아 밥을 먹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필요한 대화나 용건은 휴대전화로 하면 쉽게 해결된다.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필요한 용돈도 이체해주면 된다. 기계가 연결해주는 소통의 공간에서 기계의 지배 아래 저마다 필요한 대화들을 나누며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마주 앉아 대화하며 웃는 시간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마음을 표현하고 갈등이나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공간은 인터넷 공간이나 휴대전화로 옮겨졌다. 누군가를 향한 독백이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되고 그것이 범죄 같은 부정적인 흐름으로 악용되어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마음 상태를 당당하게 표출하는 시대가 된 것 같지만, 직접 하지 못하는 수많은 말들을 숨긴 채 뒷모습만 드러내야 하는 시대적인 외침일 수도 있다.

가끔, 교회 성도들이나 지인들의 휴대전화 상태메시지를 보면서 기도하기도 한다. 표현된 사진이나 글귀들을 보며 일상의 변화를 보기도 하고, 축하나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짧게, 의미 없는 몇 마디의 글귀들을 적어 놓은 것 같지만, 대부분의 경우가 감정이나 상황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저마다의 상처를 다독이며 산다」라는 책에 보면 나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정작 숨기는 요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상처받은 사람들과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상처를 다독이며 산다. 얼핏 다 나은 것 같아 보여도 통증은 불현듯 찾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가 만나는 많은 이들은 마음의 지옥을 견뎌내는 생존자들인 것이다. 이들은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하지만, 지금 여기서도 영원한 이방인으로 떠돌아다닌다.

 

할 말 있어요

상처가 있는 과거나 겪었던 상한 마음, 혹은 치유되지 못한 감정 등은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다른 모습으로 엉뚱하게 나타나는데 어떤 이는 폭력이나 욕설로, 어떤 이는 욱하는 분노로, 어떤 이는 엉뚱한 집착이나 과도한 애정표현 등으로 마주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표출들이 긍정적인 요소보다 부정적인 현상들로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고, 엉뚱한 책임전가를 하기도 한다.

때문에 불신자들에게 이러한 일들이 생기면 범죄로 연결되기도 하고, 은밀한 상처를 안고 평생을 사는 이들도 생긴다. 믿는 이들에게 이러한 일들이 생기면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판단, 정죄를 받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경우도 있다.

인내하고 참아야 한다는 이유로 주춤거리다 나중에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면 백이면 백, 상처로 이어진다. 그러면 후폭풍으로 밀려드는 수순은 다음과 같다. 그 사람이 싫어지고, 그 사람과 관계된 일이 싫어진다. 그러면 모임도 싫어진다. 혼자 있고 싶고, 숨어 지내며 악을 품은 마음이 된다. 정말 어이없는 작은 일로 큰 그르침을 만드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상처를 입는 경우는, 부당한 일을 겪어서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 단련하시고 훈련하시는 주님의 뜻과 섭리가 있다. 그래서 애매히 고난을 당한다고 표현도 하셨다. 또 자신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으로 범죄하거나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 말씀 아래 순종하고 고백할 때 모든 문제는 말씀으로 해결된다. 주어진 상처의 시간들을 주님께 고백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쌓아두면 문제는 해결이 안 된다. 스스로 문제 속에서 걸어 나오는 용기는, 주님께 고백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데 있다. 그리고 원망의 대상을 미련 없이 놓아주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상처 난 곳을 붙잡고 만지면 상처는 더 깊어진다. 환경을 미워한들 나에게 맞는 환경으로 바뀔 수는 없다. 상처 준 사람을 붙잡아서 마음에 담아두면 일이 풀릴 수 없다. 그 사람과 함께 상처 안에 여전히 머물러 있으면서 그 사람 때문에 계속 화를 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이 우리 삶 가운데 그 일들이 일어나게 했다는 것을 믿으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거기서 걸어 나오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이다. 나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주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다.

마이클 웰스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와 기도]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분노란 테니스 경기의 공과 같다. 양쪽 경기자가 그 공을 계속 받아치기 시작하면 공의 속도는 증가하고 마침내 한 쪽이 패해야 끝이 난다. 한 가지 중요한 다른 점은 자아 경기에서는 ‘승자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육을 나타낼 때 그리스도인이 육으로 반응한다면 그는 ‘하나의 실패자를 따라 동시에 또 다른 실패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흉한 것들을 그대로 흡수하여 받아들이면 모든 문제가 진행을 곧 멈추고 승리자로 끝나게 됨을 발견할 것이다. 즉 패자를 통하여 승리자가 된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셨다. 그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철저히 패배한 자였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한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고 믿음으로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발자취가 있고 신앙의 선진들이 앞서 가신 길이 있기 때문이다. 또 성경이 나침반처럼 우리의 길을 알려주고 있으니 어디를 가고, 어디에 숨어도 우리의 어둠과 상처는 다 드러나고 빛으로 회복을 누리거나 새롭게 새살이 돋아나는 역사가 일어난다. 사람들에게 실패자가 예수님 앞에서는 성공자다. 문제를 멈추려면 그 문제에서 나와야 하고, 문제의 사람을 놓아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병

데릭 프린스(Derek Prince)박사는 세계 2차대전 중에 의무병으로 5년간 복무했다. 처음에는 이집트, 다음에는 리비아, 마지막은 수단에서 복무하였다. 전쟁 중이라 모래 위에서 모래 섞인 식사를 하며, 모래 위에서 자고 모래와 함께 살았다. 이 생활에서 치명적인 피부질환이 찾아 왔다. 주로 손과 발과 약한 피부 부위가 갈라지고 치료가 되지 않아 염증이 생겼고, 딱딱하게 굳어 갈라져서 치료하여도 나을 기미 없이 다시 재발하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결국 남아프리카로 후송하여 입원치료를 받았는데, 2년 동안 약물치료를 계속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동료병사가 소개해준 책에서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불치병이 치료되었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믿기지 않았지만 무료하고 시간도 많아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세 번을 완독하였을 때에 피부 환부뿐 아니라 심령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피부병이 치료될 것이 믿어질 뿐 아니라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이 믿어지기 시작하였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책이 해질 만큼 읽었다고 한다. 그는 박사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목사가 되어, 성경말씀 속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죽는 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치유사역을 하다 삶을 마쳤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는 사실이고 지금도 그 역사는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받은 몸과 마음의 상처나 아픔들은 말씀의 약으로 치료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플 때, 약을 먹는 것처럼 성경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고,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는 힘이 있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우리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물며 우리 몸의 질병과 마음의 아픔, 상처들은 얼마든지 창조주의 주권아래 치료가 가능하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생사화복의 주관자가 말씀하시는데, 세상 그 어떤 말과 지식이 감히 고개를 들 수 있을까. 영혼의 보물창고인 성경에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잠언이 들어있다. 말씀은 주님이다. 오직 우리에게만 허락된 빛나는 언어, 잠언(箴言)을 만나자.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