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임에게 얼굴을 기대고, 나는 여기에 남아 나를 잊어버렸네.” 십자가의 요한 성자의 말이다. 사랑하올 예수님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자신을 잊어간다는 것은 가장 행복한 일이고 복된 일이다.

공산국가 루마니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14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던 리처드 범브란트(1909-2001). 1948년 지하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다가 납치되어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하였다. 거꾸로 매달아 채찍으로 때리는 고문 정도는 예사였다. 굶주린 쥐들을 감옥 안에 집어넣어 물어뜯게 하고, 대변을 본 그릇으로 음식을 받아먹게 하고, 십자가 틀에 묶어 놓은 채 그 위에 똥, 오줌을 누기도 하였다. 후에 감옥에서 나왔을 때는 냉장고 문 열기를 꺼려했는데, 속옷만 입고 냉동실에 끌려갔던 고문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냉동실에 들어가 얼어죽을 것 같으면 다시 따뜻한 방으로 옮겨졌고, 몸이 풀리면 다시 냉동실에 집어넣는 고문을 반복적으로 당했다.

고문으로 인해 척추와 뼈들이 부러졌고, 열두 군데의 칼자국과 열여덟 군데의 화상 자국이 남겨졌다. 또한 오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꼼짝 못하고 꼿꼿이 앉아 있어야 했다. 벽에 기댈 수도 없었다. 눈을 감는 것도, 머리를 기대고 잠시 쉴 수도 없었다. 17시간 동안 이렇게 앉아서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들어야 했다. “공산주의는 좋은 것이다. 기독교는 어리석다. 아무도 이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 포기하라.” 매일, 매주, 매년 확성기를 통해 이런 말을 들어야 했고, 지하교회 교인의 이름과 주소를 자백하라고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14년 동안 단 한 사람의 이름도 고백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밤, 그는 주님께 말씀드렸다. “주님, 보시듯이 제겐 형제나 자매도 없고 당신의 말씀이 적힌 성경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자주 사람들을 직접 방문해 말씀해주지 않았습니까? 기독교인을 죽이고 학대한 다소의 바울 같은 악한 사람에게도 나타나 주셨듯이,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예외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주님, 제게도 말씀해주십시오.” 그는 주님께서 위로의 말씀을, 믿음을 견고케 할 말씀을 주실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뜻밖에 질문을 던지셨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는 평생에 자신의 이름이 리처드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주님께 “제 이름이 리처드입니다.”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교회사에서 신앙 때문에 순교한 리처드라는 영국의 성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성인과 이름이 같았기에 “제 이름은 리처드입니다.”라고 말씀드리기가 두려웠다. 주님이 “너는 성인 리처드와 닮았느냐?”라고 물으실까봐 겁이 났던 것이었다. 그 성인과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저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한다면 1세기 로마의 핍박 아래 기독교인들은 경기장에 사자 밥이 되기 위해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런 기독교인들처럼 용감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대답할 수도 없었다.

‘저는 목사입니다.’라고도 감히 말할 수도 없었다. 목사는 밤낮으로 양들을 돌봐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주님이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실 때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주님,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제가 주님의 이름을 지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칠흑 같은 어둠의 긴 터널 속에서 자신은 전부 없어져야 하고, 오직 자신 안에 그리스도만이 살아 있어야 함과, 자신의 이름이 아닌 더욱 아름다운 이름, 만유의 주요 왕이신 주님의 이름만이 남아야 함을.

썬다 싱이 북인도 전도여행 중 동굴 안에서 대 성인 마하리시를 만났는데, 여러 번 이름을 물었으나 결코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내 이름은 크리스천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할 뿐이었다. 여자가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였던 세례 요한. 하지만 그는 그의 이름보다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먹으며 오직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만 살아가셨다.

주님께서 지금 나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난 과연 천국에 합당한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감정기복이 심하고 가난하고 평범한 어부였던 시몬이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로, 학식과 학벌과 가문이 출중했던 큰 자 사울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지극히 작은 자 사도 바울로, 얍삽하고 잘 속이는 야곱이 끈질긴 기도의 사람 이스라엘로, 비겁하고 두려움 많은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변화되기까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수많은 고통의 시간들이 있었다.

나의 이름이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일에 들먹여지면 안색이 변하고 기분이 상해서 가슴앓이를 하는 이 연약함을 어찌할꼬. 조금이라도 나의 이름을 높여주면 흐뭇해하는 이 교만과 허영심은 언제쯤 변화될까? 오랜 시간 이 광야 길을 걸어왔노라고 스스로 자부하며 안일함에 빠져 있는 이 게으름과 자애심은 언제쯤 변화될까? 온갖 수치와 모욕과 조롱을 기꺼이 당하신 어린양, 예수님.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으로 드높임 받으셨지 않은가. 더 많은 아픔과 수치를 맛보아야 하건만, 더 많이 부서지고 깨어져 고운 가루가 될 때까지 숱한 망치로 두들겨 맞아야 하건만… 힘들다고, 지쳤다고 엄살만 부리며 머뭇거리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이리저리 계산하고 따지는 이기심도, 쓸데없는 자존심도 팍팍 뭉개버리고,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헛된 명예욕도 다 꺾어버리고, 원치 않는 길로 데려갈지라도 묵묵히 순종하며 저 믿음의 선진들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얻기까지 쉼 없이 전진하자. “적당히 정욕을 즐기며 살아라. 고달프고 피곤하지 않냐? 왜 어리석게 남들이 가지 않는 이 좁은 길을 가려느냐. 아무도 너의 이름을 알아주지 않는다. 포기하라.”는 유혹의 소리가 계속 들려올지라도 순간순간 과감하게 뿌리치고 달려가자.

그 어느 것도 그 무엇도 우리의 힘과 위로가 될 수 없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며 기뻐하였던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만이 참 위로요 힘이요 소망이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은 돈도 명예도 물질도 권력도 아니다. 금과 은 내게 없어도 오직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만을 붙드는 것이다.

멀고 먼 이 광야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런 감흥이 없을지라도, 나의 이름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지라도 그저 심령 안에 거룩한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기까지 찔러대는 수많은 고통과 가시들을 감내하자. 이기는 자에게는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새겨주시듯(계2:17), 거칠고 사나운 역경을 모두 이기고 저 천국의 새 이름을 얻기까지 끊임없이 이 좁고 협착한 길을 오늘도 나아가리라. 나의 옛 본성과 이름이 모두 벗겨지고 더욱 아름다운 이름, 영원한 하늘나라에 새겨질 아름다운 새 이름을 꿈꾸며.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