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기도
 
올 여름, 청소년영성학교 수련회를 제주도로 결정하면서 제주에 관한 영적인 역사, 순교성지와 순교자들의 삶 등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지리적 특성상 관광지로 알려지게 됐지만 신앙의 관점과 역사를 중심으로 들여다보니 하나님의 역사가 녹아든 땅이었다. 가톨릭은 물론 개신교의 성지도 많고 특히, 순교자의 피가 곳곳에 묻어 있는 땅이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제주는 불모의 선교지요 꺼리는 곳이었다. 그만큼 폐쇄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순교자들을 통해 성령의 역사를 도모하셨고 희생을 통해 밑거름을 만드셨다. 이제 그 열정을 사모하는 청소년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소망과 도전이 되기를 기대한다.     
 
목숨을 건 영적 투쟁, 순교의 길

이기풍 목사는 1868년 11월 21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885년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평양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위정척사운동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서양인을 경계하였고, 청년 이기풍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집을 나서다 코 큰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였는데, 그의 도도한 모습이 보기 싫어 친구들과 떼 지어 몰려가 그의 집에 돌을 던졌다. 또한 장터에서 무슨 책을 들고 서툰 조선말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 반사적으로 발밑의 돌을 찾아 힘껏 날렸다. 날아간 돌이 마펫 선교사의 턱에 정통으로 맞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기풍은 쓰러진 그를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시치미를 떼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후 원산에 가서 스왈른(Swallen) 선교사를 보았는데, 자신이 돌로 쳐서 피 흘리게 했던 마펫 선교사가 계속 떠오르면서 마음에 괴로워하였다.

하루는 마루에서 그 일을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났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너무나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고,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그 자리에 엎드려 수없이 떠오르는 과거에 지은 죄들을 눈물로 회개했다.

1903년 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 후 목사 안수를 받고 초대 한국인 목사 7인 중 한 명이 되었다. 총회에서 그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제주도는 탐라국으로 불리는 외국과 같은 땅이었고 말도 잘 통하지 않았다. 더구나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제주도 사람들은 예수교를 굉장히 꺼렸다. 그러나 윤함애 사모와 마펫 선교사의 격려와 기도로 조선장로교회의 첫 번째 선교사로서 제주도에 파송되었다.

전도 초기에 너무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죽을 만큼 두들겨 맞기도 하고, 제주도 사람을 야만인 취급하였다고 하며 청년들이 목을 졸라 죽이려고도 하였다. 영육이 약해진 이기풍 목사님이 평양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마펫 선교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기풍 목사, 편지는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는 분투노력하시오.” 이 편지를 읽고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 기쁨이 흘러 넘쳤으며 다시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영적 투쟁을 감당했다.
1934년부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1938년 9월에 장로교까지도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신사참배에 격렬하게 반대하며 성도들에게 죽어도 절하지 말라며 순수한 신앙을 가질 것을 항상 강조했다. 70세 이상은 취조와 고문이 법률로 금지되었지만, 이기풍 목사님은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을 때까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초죽음 상태가 되어 출감조치가 결정되었지만, 나머지 목사님들이 출감하기 전까지는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결국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이기풍 목사님은 목사관으로 옮겨졌고, 마지막 성찬예식을 거행한 일주일 뒤 천국으로 가셨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순종의 길을 가라

니느웨는 오랜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힌 적국의 수도인데,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욘1:2)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는 민족적인 감정 때문에 니느웨로 가지 않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고, 하나님께서는 요나 때문에 바다 가운데 대풍을 일으켜서 풍랑으로 인해 배가 파선될 위기에 처하게 하셨다. 배에 탄 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이 재앙이 임하였는지 알고자 제비뽑기를 했는데 요나가 뽑혔다. 그래서 요나 선지자는 바다에 던져져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밤낮을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기풍 목사님이 자신이 행했던 일을 선교지에서 그대로 당하면서 회개하게 된 것과 다르지만 닮았다. 하나님은 죄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예수님을 통해 화해의 길로 초대해 주셨다. 그리고 요나와 이기풍 목사님과 같이 화해의 메신저로 살라고 명하신다. 죄로 인해 허덕이는 나를 보노라면, 내가 무엇을 할까 싶지만 나는 아무 자격조차 없음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하라시면 예 하고 순종해야 하는 일만 남았다.

내가 선 자리, 낯설고 지치고 때론 자격이 없는 것 같은 절망이 밀려올 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나를 따르라 뿐이다. 낙심되니까 절망된 말이 나오고, 아프니까 신음소리도 나오고, 억울하니까 원통한 말도 나오고, 괴로움을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원망하는 말이 나오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 모든 것을 순종으로 덮으셨다. 그 예수님의 길을 우리가 가고 있다.
 
주님과 함께 가는 사명의 길

‘목회를 잘 하고 있는가, 나는 자격이 없는 것 같다.’라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는데 요 며칠이 그 즈음이었다. 낙망의 마음이 들어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혼자 끙끙거리며 기도를 하려고 교회에 갔다. 비가 촉촉이 오던 밤이었다. 기도를 하면 감정에 복받쳐 울거나 투정을 쏟아낼 것 같아 차오르는 맘을 누르려 가만히 있는데 고요한 빗소리가 들렸다. 목으로 올라오는 말들을 누르고 가만히 빗소리만 듣고 있자니 어느새 마음이 잦아들며 평안이 몰려왔다.

때론 내가 쏟아 놓고 싶은 말들을 멈추고 가만히 있음도 필요한 듯하다. 기도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말들을 쏟아내며 주님을 귀찮게 하고 불편케 해드린다. 들려주시는 말씀들만 겸손히 들을 수 있다면 거기에도 은혜가 있음을 발견한다.
 
순교자들은 믿음으로 항거하다 죽음 외에는 방법이 없어서 그것을 받아들일 때 수많은 언어들과 끓어오르는 열정마저 다 죽여야 했을 것이다.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사명처럼 멈춰야 하는 그 순간, 가장 깊은 평화를 맛 볼 것 같다. 주님만 보일 것이다. 사명자의 길은 거기까지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름의 타당한 이유들을 들어가며 옳지 않음을 말하고, 내가 왜 그런지 변명하고 웅변하는 곳에는 평화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길이 없다. 누구나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그 길을 위해 전심전력하지만,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갈 때 그 길은 복된 것이라 여겨진다. 요나의 생각이 하나님의 깊음을 스스로 거부했을 때 요나는 한참을 스올에 빠져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내가 걷는 길이 옳아 보여도 하나님보다 높거나 깊을 수 없다. 나는 그분의 ‘것’일 뿐이다. 그분이 하시는 일에 ‘예’하며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는 ‘자’이다. 그것이 영원한 사명이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