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바라보며 날마다 노래하리라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청아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작은 방 안에서 바라다보는 하늘이건만 더없이 넓다. 하얀 뭉게구름도 떠다니고, 금이동 뒷산에서 날아온 새들도 노래를 부른다. 텃밭 앞, 담벼락의 장미넝쿨 잎새도 바람결에 살랑살랑 나부낀다.

최근에 읽었던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라는 책에 쓰인 맑고 투명한 글들이 하늘을 보노라니 가슴에 다시 피어오른다. 이오덕 선생님과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의 편지 글을 엮어 놓은 책인데 꾸밈없고 소박한 글들로 인해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지는 책이다.

“솔직히 저는 사람이 싫었습니다. 더욱이 거짓말 잘하는 어른은 보기도 싫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와 함께 살다 죽겠습니다. 선생님만은 제 마음 이해해 주실 겁니다. 나라고 바보 아닌 이상 돈을 벌 줄 모르겠습니까?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 싫어, 나는 돈조차 싫었습니다. 돈 때문에 죄를 짓고, 하늘까지 부끄러워 못 보게 되면 어쩌겠어요? 내게 남은 건, 맑게맑게 트인 푸른빛 하늘 한 조각.

이오덕 선생님.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떳떳함만 지녔다면, 병신이라도 좋겠습니다. 양복을 입지 못해도, 장가를 가지 못해도, 친구가 없어도, 세끼 보리밥을 먹고 살아도, 나는,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

시대가 다르고 걸어온 길과 사는 곳이 달라도 마음이 깨끗하고 맑은 분들의 글은 어딘가 모르게 다 닮아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나오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는 대목과도 같다. 하늘을 쳐다 볼 수 있는 떳떳함을 지녔다면 바보여도 괜찮고, 좋은 옷을 입지 못해도 괜찮고, 결혼을 안 해도 좋고, 친구가 없어도 좋고, 맛없는 꽁보리밥을 먹어도 종달새처럼 노래할 수 있다는 고백이 부럽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서 자신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는 그 결연한 마음도 부럽다.

요즘 나는 사람이 싫어졌다. 권정생 선생님의 말씀처럼 거짓말 잘하고, 허례와 위선의 가면을 쓰며 거짓말을 잘하는 어른들이 보기 싫어졌다. 큰 어른이라고 자신보다 힘이 없거나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교묘하게 누르고,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김 받기를 원하는 가짜 어른들이 정말 싫어졌다.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살겠다고 하면서도 물질을 탐하기도 하고, 명예를 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은근히 명예를 얻고자 다투는 어른들이 싫어졌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주님은 계속 말씀 하신다.

‘왜 저분은 저만한 위치에 있으면서 저렇게 행동하실까? 너무 위선적이야.’ 어른 같지 않은 어른을 보고 비판을 하였는데 어느새 나도 가짜 어른이 되어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반갑게 맞이하자 큰 아들이 동생을 창녀와 함께 한 사람이라고 업신여기는 것처럼, 나 역시도 진리의 잣대로 가까운 이웃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교만한 어른이 되어있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따랐던 진리는 퇴색되고, 좀 더 가지려고, 좀 더 높아지려고, 좀 더 내 영역을 넓히려고하는 욕심 많은 어른이 되었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양 노래를 부르지만, 눈속임과 겉치레와 탐욕의 혹을 달고 있는 혹부리 영감이 되어버렸다. 희생하고 손해를 보기 보다는 남들이 나처럼 성실히 일하지 않는다고 원망불평을 쏟아내는 수다스러운 어른이 되어버렸다. 굳은 일은 마다하고, 땅에서 떨어지는 하찮은 부스러기에 눈이 멀어 이리저리 사람들과 부딪히는 철부지 어른이 되어버렸다. 땅의 것만을 바라보며 속상해하고 울고 웃는 이들은 아직 가짜 어른이다. 세상의 것을 다 잃어버려도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한 점 부끄럼 없는, 예수님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진짜 어른이다.

로버트 블라이는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 어른을 정의하기를 땅에 떨어진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위를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삶을 살아내는 어른들은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분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곁눈질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족함과 결점을 솔직히 인정하며 실수를 해도 포장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신의 결점이 드러날수록 기뻐한다. 이해받지 못하고 불리하게 판단을 받아도 변명하지 않는다. 도저히 저 사람은 용납할 수 없다고, 도저히 저 일만은 못한다고 핑계거리들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저 사랑하는 주님의 발치에 머물 뿐이다. 아무리 부당한 취급을 당해도 슬퍼하지 않고, 오랜 기간 바람 한 점 없는 뙤약볕을 걸어가도 묵묵히 하늘만 바라보며 용감하게 전진한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어디에 있든지 하늘나라로 눈을 들어 올립시다.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집에 있을 때, 길을 걸으면서, 버스 안에서, 한밤중에도 마음을 하늘나라로 들어 올립시다. 하늘나라를 생각하면 할수록 용기가 날 것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듯 지극히 작은 죄조차도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은 땅의 자리가 아닌 하늘의 거룩한 보좌를 사모한다. 하늘만 바라보아도 자신의 추함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옷자락을 살짝 벤 것조차 마음 찔려하던 다윗처럼,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를 귀히 여기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도 어른이 될 수 있다. 서로 어른이라고 싸우지 않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도 하늘을 바라볼 때만이 가능하다.

「성 프란치스코」라는 영화의 시작 부분에 퍽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프랜시스가 거꾸로 보면서 “하늘이 땅을 바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하면서도 아이처럼 잘 속는다. 땅의 것들이 우리의 삶을 바치고 있는 것 마냥 지위, 권력, 명예, 물질, 건강, 외모, 지식 등 땅의 것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하늘을 바라보기 위해서 세상의 것들과 끊임없이 이별해야 한다. 명예와 이별해야 하고, 돈과 입에 맞는 음식을 먹고자 하는 식욕과도 이별을 해야 하고, 믿었던 사람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신과 모욕, 수치심을 겪어야 사람과 이별할 수 있다. 나의 전부라고 여기며 오랜 기간 열심과 충성을 쏟아 부었던 자리도 하나님께서 놓으라고 하면 언제든지 이별할 준비를 해야 한다. 아픔과 고난과 고통이 수없이 따를지라도 땅의 것들과 이별을 잘 하는 사람이 진짜 어른이 될 수 있다.

성 프랜시스는 젊은 날 성공과 야망을 좇아 십자군전쟁에 나갔다가 전쟁의 참혹함을 겪는다. 전쟁터에서 집으로 돌아와 쓰러진 그는, 한동안 병석에 누워서 지내다가 악몽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창가에 앉은 아주 작은 종달새 한 마리를 만난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노래하던 그는 마침내 지난날의 부유함과 방탕한 삶과 이별을 고한다. 거적대기 같은 옷을 입어도, 밥을 구걸해도, 쉴만한 집 한 채 없어도, 많은 사람들이 미치광이라고 놀려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순결함과 청빈한 삶을 갈망하면서 말이다.

나의 요즘을 돌아본다. 이별에 익숙한 지 여전히 붙잡고 놓지 못해 안달하는지. 땅의 것이 사라진다고 아파하고 부끄러워하지는 않는지. 하늘을 바라보며 맑고 환하게 노래하는 사람이 되려면 모두를 사랑하며 자꾸만 이별하고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 하늘을 바라보며 맑게 노래하는 착한 아기 새로 살자.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