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길] 최고의 목표를 지각하라

 ‘지각’이라는 단어를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단어를 잘못 사용할 경우에는 진리 자체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것을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지식적인 면에서 혼돈하게 만들기도 하거든요. 어쨌든 그 지각이라는 단어를 잘 사용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어요. 성경 중에서 지각이라는 말이 히브리서 5장에 나오지요. 장성한 믿음에 대하여 설명을 하기 위해서 지각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성령의 열매」 중에서

 

지각의 의미

‘지’는 알 지()자고 ‘각’은 깨달을 각()자다. 그러니까 지각한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격적인 성장을 하게 되는 때부터 “지각이 정상적으로 열린다.”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의 연령대로 보면 대개 철이 난다고 할 때부터 지각이 열린다고 말들 한다. 지적으로 바르게 깨달아야 하고, 지식적으로 잘 깨달은 사람이어야만 그 지식을 따라서 정상적인 영적 진보를 가져온다.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잘 무장되지 않으면 잘못된 신앙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성장하면서 점점 더 폭넓고 깊이 있게 깨달아지는 것이 지각이다. 먼저 듣고서 충분히 깨달아야 한다. 우리 생활에 필요한 말씀으로 적용하려면 산 지식이 되어야 한다. 듣기만 하고 머릿속에 담아놓기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은 지식에 불과한 것다. 그러다가 영감을 통해서 온전한 깨달음을 얻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지적인 면에서도 발전하게 되는데, 그때 삶에 적용되는 말씀, 레마(Rema)가 되는 것이다.

점점 더 튼튼한 지식으로 무장하면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처럼 될 수 있다. 힘찬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 부족하여 그 불완전한 바탕 위에서 실천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쉽게 허물어지거나 흔들릴 수 있다.

지각이라는 말 대신에 지성 혹은 지식 등으로 필요 적절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지각은 점점 폭이 넓어지고 온전해가는 것이며 단번에 되는 일은 없다.

 

높은 단계로 가기 위하여

지성을 통해서 지각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나 목회자들이 기복신앙을 강조하고 기적과 은사에 치중하고, 교인들 숫자 채우는 데 급급한 모습에서는 성자성녀들의 깊은 신앙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러한 곳에서는 지각이 열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풍성한 설교가 안 되는 것이다. 현실 가운데서 보편적인 것만 대충 얘기할 뿐이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하나님 일도 잘 감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것만 나오는 것이다. 좀더 참된 신앙의 행복, 성장한 믿음 등에 대해서는 상당히 빈약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지각이 더 높은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적인 것에 대한 설교나 강의, 증거 내용이 있어야 된다. 그런데 큰 교회들에서 증거되는 말씀들 대부분이 성도들 전체를 위하여 대중적이고 그다지 무겁지 않은 십자가만 다루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어떻게 보면 그리 하기 때문에 큰 교회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천로역정에서 말하는 지고의 경지, -ㄹ라까지 도달하도록 장려하고, 천국 곳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익은 열매가 되라고 적극 권면하여 영적 지각을 심어주는 설교를 듣기는 어렵다.

익은 열매가 된 분들의 체험적인 내용, 행실, 인격적인 변화 또 여러 가지 쓰라린 고난을 겪으면서 통과하는 연단 과정, 이런 것이 종합적으로 증거되어야만 지각이 잘 열리게 되고, 그 목표를 지향하며 꾸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그야말로 자기의 모든 시간과 재능과 인생 전체를 걸고 달려가는 길인데, 이것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설교가 많지 않다. 빈약하다.

 

어느 성도의 고백

“방송을 통해서 큰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를 많이 듣거든요. 주일이면 실황중계, 녹음중계 많이 나와요. 그것을 들어보면 영적으로 높은 경지에 대해서 별로 얘기가 안 나와요. 그러니까 성도님들이 높은 목표를 바라볼 수 없어요. 설교하시는 분이 그런 지각이 열릴 수 있도록 강조해줘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되고 있으니까요. 천국에 가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것도 얼마든지 최고의 경지에 대한 신앙관을 담아서 설명할 수 있거든요. 그냥 막연하게 ‘천국이라는 어떤 행복한 나라가 있는가보다.’ 생각하면서 거기 가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이라면 어린아이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천국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면 그 목표를 향해서 조금이라도 더 달려가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달려가도 가장 높은 천국, 다시 말해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목표에 도달하기 어려운 것 아닙니까? 가톨릭 십자가의 요한 성자가 쓴 책을 보면 목표가 분명해요. 그래서 가톨릭에서도 신비박사라고 하는 칭호를 주신 것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도 비슷한 분으로 생각되는데,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가톨릭 안에서 많은 수도자들에게 목표와 방향과 가치관을 선명하게 제시하는 경험적 신학에 특별히 해박하시거든요. 아빌라의 테레사도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미지근한 수도생활을 하다가 개혁을 결심할 때 하나님이 확실하게 열어주신 것 같아요. 크게 지각이 열린 것이지요.

 

최고의 목표를 지각하라

주님이 우리에게도 지각을 열어주시면 열심히 살 것 같다. 그러나 광야의 길을 가고 있는 성도들은 성령께서 도와주시는 한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다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달하면 내면적으로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점점 성장함에 따라서 조금씩 더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보다 탁월한 영적 지도자나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의 삶을 통해 깨닫고 바라보는 지각이 필요한 것이다.

영적으로 완덕(完德)까지 성장해야 되는데 거기까지 성장하는 분들은 극소수다. 그러나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 하나님의 초청은 누구에게나 다 공평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의 요한처럼, 어거스틴처럼, 토마스 아 켐피스처럼 되기를 바라신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영적 성장은 사람마다 다양하다. 그런 성자들처럼 되라고 초청은 받았지만 궁극적으로 이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쨌든 최선을 다해서 달려가야 한다. 단번에 되는 것은 없다.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이고, 어느 정도 성장했느냐에 따라서 주님을 얼마나 닮았는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또 그것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도 영원히 누리게 되는 것이므로 비록 최종 목표에 도달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선을 향해 달려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어느 정도 닮았는가, 이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30퍼센트, 어떤 사람은 50퍼센트, 70퍼센트, 90퍼센트를 닮았을 수 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많이 닮은 만큼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더 풍성하게 누린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필연적으로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기왕이면 많이 닮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꼭대기까지 도달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비록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날마다 최선을 다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생활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최고의 목표를 지각한 사람이 그것을 바라보고 더 빨리 달려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