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병, 불통을 넘어 소통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은 불통의 시대, 불통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 정치 지도자들과 국민들 간의 불통, 부모와 자녀 간의 불통,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불통, 사역자들 간의 불통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 불통은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 나아가 나라 전체에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당면한 문제를 놓고 서로 허심탄회하게 소통을 하다보면 오해는 풀어지고 합당한 해결책도 찾을 수 있는데 말이다.

대통합을 이루자

헌재에 의해 대통령 탄핵이 결정되고 첫 주일인 지난 312일 주요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이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한국사회 대통합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또 이번 사태가 법과 질서가 회복되고 국가시스템도 정비하는 계기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대통령 탄핵 결정 이후 대한민국은 역사의 기로에 서 있다. 이런 일로 모두가 깊이 성찰하는 가운데 국민 대통합을 이룰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호전적인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북한은 지금 핵무기라는 칼자루를 쥔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것은 자칫 주변국들의 신경을 자극하여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지금은 소통과 화합으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때이다. 한쪽에서는 촛불을 밝히고 다른 쪽에서는 태극기를 앞세우며 서로를 비판하고 매도하는 극단적인 국론 분열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 예수님이 원수들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듯이, 교회는 대립과 갈등으로 얼룩진 이 나라가 하루 빨리 회복되도록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울며 기도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큰 풍랑을 만나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배와 같은 실정이다. 문제는 이 풍랑이 우리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데 있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것을 맡기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이다. 모두 하나가 돼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를 긍정하며 소통할 때이다.

망국의 병

하나님과의 불통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가족 간에 불통하면 서로를 원망하다 좀처럼 낫지 않는 깊은 상처가 되어 평생 원수가 되기도 한다. 어떤 조직이나 사회든 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다들 선한 명분을 앞세우고 서로를 탓하다가 결국 분열되고 망하는 것이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연개소문이 대막리지로 있을 때 고구려는 만주일대와 요동반도를 주름잡을 수 있었다. 중국의 당나라도 감히 고구려를 함부로 넘보지 못할 정도로 강국이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죽은 뒤, 그의 세 아들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다투면서 고구려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장남 남생이 부친을 이어서 대막리지가 되어 지방성을 순시하는 사이, 동생들인 남건과 남산이 형을 배신하고 권력을 차지했다.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남생은 당나라에 망명을 청하고 외세의 도움으로 동생들로부터 권력을 되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은 오히려 어부지리를 노려 남생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삼국 중 가장 강력한 고구려가 멸망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연개소문의 세 아들이 불화와 반목했기 때문이다. 조국을 지킨다는 대의를 앞에 두고 사심, 사견, 사욕을 버리지 못해 결국 너도 나도 다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가정, 교회, 사회, 나라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면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빈틈을 노리고 역사하기 마련이다. 불통은 내 말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교만, 자신의 생각만 말하고 다른 사람의 말은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 아집과 독선의 결과이다. 배후에서 더러운 개구리의 영들이 역사해서 서로를 탓하고 비판하다가 싸우기 마련이다(16:13).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라”(12:14), “하나님은 너희를 화평 중에 부르셨다”(고전 7:15)고 말씀하고 있다.

화목의 비결

어느 마을에 이웃해서 사는 두 집이 있었다. 한 집은 아이가 없어 부부 단둘이 살았지만, 그들은 밤마다 부부싸움을 해 큰 소리가 새벽녘까지 오갔다. 바로 그 이웃집은 부부와 시부모 그리고 두 아이들이 함께 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언제 보아도 온 집안이 싱글벙글 웃는 낯이었고 행복해 보였다.

늘 다투기를 잘하는 이 부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결국 어느 날 이웃집을 찾아가 그토록 행복한 이유를 물었다. “여보세요. 당신은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식구가 적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서로 싸우지 않고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그 비결이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이웃집 아저씨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우리가 행복한 이유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당신들 집에 싸움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두 분 모두가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며, 우리 집에 싸움이 없는 이유는 모두 나쁜 사람들만 모여 살기 때문입니다.” 두 부부는 깜짝 놀라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되물었다.

가령 제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던 물그릇을 모르고 발길로 차 엎질렀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때 저는 내가 부주의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제 아내는 빨리 치우지 못해 죄송하다고 책임을 자기에게 돌리죠. 그러면 또 옆에 계신 우리 어머니께서는 나잇살이나 먹은 내가 보고도 못 본체 했으니 내 잘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두가 자신해서 나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죠. 그렇게 잘못은 자신에게 돌리고, 잘된 일은 다른 사람 덕분이라고 서로 칭찬하다보니 항상 웃음이 넘쳐나게 되었답니다.”

이 말을 들은 부부는 자신들이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를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당신을 살리기 위해 내가 기꺼이 죽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제는 그 십자가를 나부터 먼저 져야 할 때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분쟁과 다툼을 피하기 위해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12:10)고 하셨다. 나와 견해가 다른 상대방의 형편과 처지를 존중해야만 내가 옳고 너는 그릇됐다는 아집을 극복하고 소통할 수 있다.

내 뜻과 주장을 앞세우기만 하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사회, 말도 많고 탈도 많아 기회만 주어지면 서로를 예리한 칼로 난도질하는 그런 공동체에서 누가 헌신하고 희생하겠는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자각이 있다면 나부터 먼저 소통의 손길을 내밀자.

인간은 타락하여 하나님과 불통하고 죄인이 되었다. 하나님은 죄인 된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다. 그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과 깊은 소통을 하는 은혜로 나아가자.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