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런 사람이기를

봄은 조용히, 어느 순간 와 있는 듯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흐리다. 대신 높게 자란 나무와 막 피어오른 꽃들이 보인다. 자연은 숨길 수 없는 듯 꽃봉오리가 청초함을 드러내며 기지개를 켠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진다. 곡선을 그리며 살랑살랑 가지가 흩날리고 꽃잎이 떨어진다. 한참을 보다가 목련처럼 인생도 격정적이고 순간 아름답게 피었다가 말없이 진다는 걸.

볼품없는 땅에서 갓 피어난 샛노란 들꽃에게 말을 건네 본다. 화려하지 않고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음지에 피는 넌 행복하겠구나. 널 닮고 싶구나. 아무런 욕심 없이 하나님만 찬양할 수 있는 넌 가치가 있단다.

예수님은 신분이 낮은 사람과 가난한 자들의 진정한 이웃이며 친구셨다. 높은 위치에 있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거룩한 옷을 입고 거룩한 땅을 밟으며 거룩한 사람들과만 교제했다. 그것을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여겼다. 그들에게 비친 예수님은 보잘 것 없고 미친 사람 같았으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대역죄인, 자신들을 대항하는 혁명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루셨다. 예수님이 계신 곳은 어두움이 존재할 수 없었다. 어둠 가운데 있던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빛을 보게 되었고 어둠에서 벗어났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짊어지신 예수님, 물질만능주의 사회, 손만 뻗으면 다 취할 수 있는 지금을 사는 나는, 빛을 비추기에는 몸도 마음도 지나치게 부자다.

필립보 네리(1515-1595)는 교육하는 일과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공동체를 세웠다. 그는 인도선교사로 가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가장 적합한 사명을 주셨다. 그 시대는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였으므로 버려진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도둑질과 온갖 나쁜 짓을 일삼았다. 그 아이들에게 사랑에 복음을 전하며 선도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실천적인 산교육을 했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은 조건 없는 사랑에 스스로의 가치와 존귀함을 깨닫게 되었다. 스스로 가난을 자처했고, 버림받고 병들고 낮은 사람들과 스스럼없는 친구로 지내며 섬겼다. 네리에게 문제아처럼 보이는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이웃이자 벗이요, 특히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모든 물질을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일에 다 쓰다 보니 교회는 낡고 허름했다. 당시 종교적 권위의 최고 위치에 있던 이들은 필립보 네리가 경건하지 못하며 규율에 어긋난 일을 하고 교회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일침을 가했다. 한번은 교단에서 방문한다는 통보와 함께 그때까지 예배를 드리는 건물의 공사가 되어있지 않으면 공동체가 안전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 일을 해내기엔 부족한 시간과 환경이었지만 모두 힘을 합해서 끝마칠 수 있었다. 방문한 이들은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주목했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고 단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강력한 법이나 규칙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규칙만 필요합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안락한 환경, 여유로운 생활, 좋은 조건들과 능력을 갖춘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척박한 환경에서 언제나 잠과 음식은 부족했고, 주변엔 병자, 창녀, 가난한 자, 무지한 자들에 둘러싸여 사셨다. 그러한 예수님을 본받아 유능한 사람보다 무지한 사람을, 부자보다 가난한 자를, 선한 사람보다 악한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일을 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를 고민한다.

내 습성은 조금 더 안전하고, 조금 더 편안한, 조금 더 유능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넓은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셨던 좁은 길을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따라갔다.

부족하고 볼품없는 나도 그 길을 따라가고 싶다. 완벽하게 갖춘 것에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들어가실 틈이 없다. 하지만 약하고 모자란 것 속에서는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겸손하고 작은 것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사랑을 본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또 그런 사람을 친구삼아 섬기는 자가 되기를 기도해본다. 낮은 곳에 임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낮은 마음과 자세로 전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허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