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와 영월이 만나는 경계선에 사는 까닭에 고속도로나 지방도로를 이용할 일이 많다. 이른 아침, 도로를 달리다보면 로드킬 당한 짐승들의 사체를 자주 보게 된다. 요즘 들어 고라니보다는 너구리, 족제비 등 체구가 작은 녀석들이 더 자주 눈에 띈다. 볼 때마다 ‘저 짐승들은 본능을 따라 살다가 저렇게 허망하게 끝나는구나.’였다. 내가 만약 저런 짐승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면 동일한 모습으로 죽을 수 있겠다 싶다. 물론 이성 없는 짐승들은 이런 고민조차 할 수도, 할 필요도 없겠지만. 

현대의 흐름 속에 ‘생명’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해지면서 예전보다 더 진지한 성찰과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집에서 키우는 개와 고양이에게도 좀 더 생명의 가치를 부여하여 데리고 노는 애완견, 애완묘라는 명칭이 반려견, 반려묘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예전 같으면 기삿거리도 되지 않았을 동물학대 이야기가 뉴스에, 고발 프로그램에 자주 언급되어 많은 분노의 공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람만이 최고고, 모든 동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며, 사람만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던 구태적인 생각들에 전환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때로는 선을 넘기도 한다. 

동물의 생명을 아끼고 보호해야 하는 이유가 그 동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동의할 수 있지만, 그동안 무시되고 홀대 당하던 짐승의 생명 가치를 사람의 생명과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말 그대로 오버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점차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한쪽에서는 동물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면서 즐기는 가학적 사이코패스 기질을 가진 이들이 폭로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유산을 물려주고,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주고, 외출하면서 값비싼 애견호텔 서비스에 맡기는 등 극단의 충돌을 보게 된다. 기울어진 축은 어느 정도 보완하여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더 지나치면 또 다른 기울기를 만들 뿐이다. 

왜 인생(人生)의 무게는 수생(獸生)의 무게보다 무거운 것인가. 짐승들의 삶은 이 땅에 속한 것이고, 인생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1).  

다시 말해서 짐승은 땅에 구속된 유한의 삶이고, 인간은 하늘에 구속되어야 할, 영원에 잇닿은 존재라는 것이다. 더 중요한 차이점은 짐승은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인간은 하나님이 손수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물론 실제로 하나님이 토기장이처럼 손수 흙으로 빚으셨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생기(영혼)-을 불어넣어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짐승과 사람은 격이 다르다. 창세기와 전도서 말씀을 연결하면, 인간은 하나님께로 와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오늘날 생명공학이 발달하여 복제 짐승들을 만들어내는 시대다. 이것만으로도 깜짝 놀랄 만한 일이지만, 성경을 믿는다면 인간 복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 인간의 육체는 혹여 복제해낼 수 있어도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분명하기에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신다면 ‘영혼을 가진 인간’을 인간이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세계 갑부 순위를 다투는 몇몇이 생명공학 연구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유전자 변형 혹은 조작을 통해 노화를 방지하거나 생명을 연장시켜서 궁극적으로는 영생을 얻고자 하는 연구다. 현대판 불로초.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230조가 넘는 천문학적인 재산과 소유를 다 써보지 못하고 어찌 눈을 감고 싶겠는가. 인간 수명의 단축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에 도전하는 현대판 바벨탑이 아닐 수 없다. 

생명과를 먹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그 죄가 점점 더 차고 넘쳐서 결국 노아 시대에 하나님이 그토록 보시고 좋아하셨던 세상을 물로 싹 쓸어버리신 이후 인간의 수명은 급격히 낮아졌다. 이것을 돌이키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돌이키시게 하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인간이 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거룩해지는 길만이 해답이다. 이런 원리로 대환난 이후 하나님께서 이 땅을 회복하셔서 수명이 천년 가까이 되는 그리스도 왕국이 세워지는 것이다. 현재와 같이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세상의 즐거움을 더욱 오래 누리려고 수명만 늘리는 것은 탐욕으로 더 빨리 세상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미친 짓인 것이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인간 삶의 무게, 생명의 가치는 이 땅에서 오래 사느냐 못 사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잇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오래 사는 것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참된 것을 누릴 준비를 잘하는 것이 이 땅의 삶에 가장 중요한 목적이요 살아가는 이유인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짐승들의 허망한 죽음을 보면 자기와 동일시하여 회의주의에 빠지거나,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에 ‘현재를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내 하고 싶은 대로 살자.’ 하는 쾌락 중심의 삶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본능을 따라 목적 없이, 그저 살아 있으니 육체를 위해 살아가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영을 가진 존재들이다. 이것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짐승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바라봐야 할 소망은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목에 마음 빼앗기지 않는다. 목적지가 분명하다. 너무 많은 것을, 불필요한 것들을 이고 지고 가면 힘이 든다. 꼭 필요한 것만 챙겨야 인생의 무게가 버겁지 않다. 감당키 버거우면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쉼을 주시고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주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다시 남은 길을 달려갈 힘을 얻는다. 삶이 버거우면 십자가에 계신 주님을 보자. 주님을 통해서만이 참된 쉼이 있고 위로와 용기를 부여받을 수 있다. 우리는 하찮은 존재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주심으로 생명을 약속받은 자들이다. 잠시 지쳐 주저앉았다면 조금 쉬었다가 주님의 위로를 받고 다시 힘을 내어 달려가자. 

 

기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