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기쁨

성 프랜시스가 제자와 함께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맨발로 걷고 있었다. “선생님, 참된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형제여, 우리가 아무리 거룩한 덕과 감화의 모범을 보여준다 해도 거기에 완전한 기쁨은 없소. 우리가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마귀를 내어 쫓으며, 죽은 자를 다시 살린다 한들 거기에는 완전한 기쁨이 없소. 우리가 온갖 말과 지식에 능통하고, 장래 일과 심지어 인간 양심의 비밀을 꿰뚫어 본다한들 거기에도 완전한 기쁨이 없소. 우리가 선교에 아주 능하여 이교도와 불신자들을 모두 회심시켜 예수님을 믿게 한다할지라도 거기에도 완전한 기쁨이 없소.”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가다 어느 집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 문지기가 나오더니 다짜고짜 “이 거렁뱅이 도둑놈들아!” 라고 욕설을 하며 뺨을 때리며 몽둥이로 그들을 쫓아냈다. “형제여, 바로 여기에 완전한 기쁨이 있소.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달게 참아 내고, 이것이 바로 복되신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가난과 고통, 모욕이라 생각하고 즐거워한다면 바로 거기에 완전한 기쁨이 있습니다.”

고약한 하나님

십자가의 성 요한이 완화파 가르멜 수사들과의 갈등으로 똘레도 감옥에서 고문과 온갖 수치, 모욕을 당하던 때의 이야기다. 요한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몇 주간을 보내니 입맛까지 떨어져서 며칠씩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도 못하였다. 게다가 며칠씩 변기통을 비우지 못하게 하여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음이 산란해지면서 이 지겨운 곤욕을 치르며 버티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지 의혹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제발 자기 목숨을 거두어 가시길 바라기까지 하였다. 사실 그가 자신을 위해서 간구한 것은 이것뿐이었다.

이제까지 하나님은 그의 삶의 흔들림 없는 한 부분이 되어 왔었다. 똘레도에서 감금된 처음 몇 달 동안 견디기 어려웠지만 그런대로 늘 기도를 바치면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철저한 부재를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자신의 전 생애, 과거와 현재, 모든 것이 헛된 것 같이 생각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그를 번민케 하고 육신의 고통까지도 더해 주었다. 그는 아주 버림받은 것 같아 자포자기하였다. 몸가짐이 지나칠 만큼 깔끔했던 그가 몇 달 동안이나 세수도 할 수 없었다. 여름의 무더위가 시작되자 숨이 막혀 견딜 수 없는 지독한 열기가 그를 괴롭혔다. 그가 갇혀 있는 골방은 화덕이나 다름없었다. “도대체, 이 고약한 하나님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가? 왜? 무엇 때문에?”

고약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

도대체 왜 프랜시스는, 경건한 삶을 살거나, 능력을 행하거나, 신비한 지식을 깨닫거나,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들에서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가. 그러한 것들은 자신을 자랑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고난은 철저히 자기 부인과 희생 속에서 이루어지며 거기에는 자기 영광이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위로만 기다려지는 곳이다. 모든 육체적 욕구와 자랑이 사라진 곳에 주님은 임하시므로.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을 위해 전부를 내 건 사람이다. 더 철저하고 완벽하게 주님을 따르고 싶어 원치 않는 비참한 환경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신 분이다. 하나님을 위해 선택한 길에 미칠 것만 같은 고통의 순간을 맞이하면서도 그는 그 하나님을 고약하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절정의 순간에 드려지는 사랑의 표현 같아서 살짝, 질투가 날 것 같다. 당당하게 외치는 고약한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요한의 심령은, 그 고약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사랑이 넘치고 넘쳐서 흘러나온 표현이 고약한 하나님이다.

프랜시스와 십자가의 요한 성자는 주님과 대화를 하고 있다.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그분의 임재를 느끼며 그들이 정리하고 경험한 방식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주님과 아주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이다.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정의하여 삶에 내려놓는 방법들은 저마다 다르다. 누구는 이렇게, 누구는 저렇게, 천차만별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 끝없이 대화를 시도하느냐 안하느냐의 차이에 있다.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어느 때엔 하나님이 전혀 안 계신 것처럼 살고, 어느 때엔 하나님이 안 계시면 안 될 것 같은 절실함을 드러 낼 때가 있다. 언제나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 방식으로 정의하고 삶에 펼쳐 놓곤 한다. 참된 기쁨 역시 우리 방식으로 기뻐하게 되고, 고약한 하나님은 절실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을 고약한 노인으로 만들곤 한다.

지금보다 얼마만큼 더 비참해야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이러다가 버림받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이 엄습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나날들은 분명 평안하고 안전한 때이다. 참된 기쁨과 고약한 하나님은 분명 함께 임하신다.

어디까지 가야할까

어떤 방식으로 참된 기쁨을 얻을 것인가. 어떻게 고약한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가장 깊은 감격의 순간을 맛볼 것인가. 주님과 대화하는 수밖에 없다. 기도하는 수밖엔 길이 없다. 기도 외엔 다른 유가 나갈 수 가 없다.

하나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원이다. 주님과 대화하는 순간을 우리는 기도라는 이름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주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어디서나 우리의 행위와 마음까지 감찰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신성성과 완전성,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대화의 시간과 장소, 그리고 방법까지 변화를 줄 때임에는 분명하다. 형식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화석같은 자리와 마음을 망치로 꽝꽝, 두들겨서 깨뜨릴 때이다.

야곱의 믿음의 승리는 밤새도록 씨름하지 않고서는 얻어질 수 없었다. 하나님은 우연히 또는 바쁘게 들락날락하는 이에게 그분의 마음을 주시지 않는다. 홀로 하나님과 더불어 많은 시간을 갖는 것이 그분을 아는 비결이요, 그분의 영향을 받는 비결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끈질김에 굴복하신다. 진지하고 꾸준하게 하나님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표시하는 자에게 가장 풍성한 은혜를 주신다. 프랜시스가 말한 고통의 순간, 비참한 순간이 내 몸에 직접 느껴지고 환경으로 다가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십자가의 요한처럼 고약한 하나님을 부르기까지 처절하게 되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깊어질 것이다. 그 가엾은 지경까지 가야 하지만 그것을 사모하는 이는 매우 적다. 결론은 고약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이 정답인데도 말이다.

두려워 하지 말라

오래 전에 버렸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울컥, 올라오고 나의 약하고 지독한 연민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순간에는 그래도 하나님을 찾고 울기라도 한다. 그런데 정해진 틀, 많은 시간, 일을 하나님을 위해 떼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하나님이 안 계신 상황으로 전락한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매일 드리지만 냄새도 맡기 싫다며 고개를 돌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정해진 시간, 그곳에 앉아 있지만 열정이 식어버린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게으르고 나약하고 교만하기까지 한 바리새인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형식적으로 부르고 있는 가증함이란 고약한 하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것만 같아 속상하고 괴롭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오래된 화석처럼 굳어진 형식엔 변화가 없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완전한데, 더 완전한 데 나아가야 하건만 중언부언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그저 그러고 있을 뿐이다.

주님은 여러 번 밤을 새워 기도하셨다. 그분은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다. 오랜 시간에 걸친 많은 기도는 그분의 생애와 인격을 형성했다. 바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했다. 다니엘은 중요한 일을 제쳐두고 하루에 3번씩 기도했다. 다윗의 새벽, 낮, 그리고 밤 기도는 많은 경우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성경의 많은 이들이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쳤으며, 어떤 경우에는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이 이들의 습관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으깨어지고 으스러지고, 암흑의 구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홀로 철저하게, 홀로 번민하며 괴롭고 쓰라린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을 토하는 그 순간까지 가야 참된 기쁨이 내 것이 된다. 그러나 번민과 뜻밖의 욕정과 갖가지 욕망이 무섭게 치밀어 오르는 그 순간. 자기 안에 있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것들, 또는 이미 오래 전에 스스로 억눌러 없애 버렸다고 생각한 것들이 의식 속에 거듭거듭 되살아날 때가 바로 그때이다. 모든 것이 질질 끌어다가 암흑 속에 내동댕이치고 있는 것 같고, 그 모든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또 그런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고는 괴로워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주님과 대화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곧 참된 기쁨이 주어질 것이므로 조금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고약한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은혜가 풍성하신지 이제 곧 알게 되리라.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