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난처는 어디인가
1892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코리 텐 붐은 1983년까지 91세를 살다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 캐스퍼 텐 붐은 유서가 깊은 시계방을 운영하셨고 매일 아침 8시 30분이 되면 성경을 꼭 읽고 하루일과를 시작하는 신실한 분이셨다. 부모님은 가난 속에서도 이웃을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알았던 분들로서, 코리는 그런 부모님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코리와 언니 베티는 결혼을 하지 않고 세계최초의 여성 시계수리공으로 아버지와 함께 일하면서 성경공부 클럽을 운영해나갔다.
제2차세계대전 중 코리가 50대가 되었을 무렵, 독일나치의 군대는 네덜란드까지 점령해나갔다. 유대인 탄압이 가중되면서 평화롭던 네덜란드도 매서운 공포의 바람이 감돌았다. 학살의 삭막한 기운이 뒤엎던 때, 텐 붐 시계방과 그 위의 가정 살림집은 도망친 유대인들의 따뜻한 은신처가 되었다. 처음에는 곤경에 처한 유대인을 돕기 위해 시작했는데 소문이 퍼져 많은 유대인들이 찾아들었다. 나치경찰들이 들이닥치게 될 위급상황에서 그들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방을 개조시켰다. 발각되면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코리네 가족들은 이웃을 돕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의무라고 여기며 더 용감하게 헌신했다. 
1944년 어느 날 자신들이 숨겨준 유태인의 밀고로 인해 텐 붐 가족 전체가 체포된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돌아가시고 언니 베티와 코리는 독일의 악명 높은 라벤스부르크 수용소로 끌려가 잔혹한 수감살이와 강제노역에 시달린다.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막사에 700명이 함께 지내야 했다. 너무나 비위생적이고 빈대와 이가 득실거리는 공간에서도 그녀들은 날마다 말씀을 전하고 수감자들을 위로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몸이 약한 언니는 수용소에서 먼저 세상을 떠나고, 코리만 기적적으로 석방이 된다.
위험을 무릅쓴 선행의 결과는 체포와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이런 환경으로 이끄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었다. 마침내 석방되었지만 코리는 예전의 편안한 삶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석방 이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집 한 채 없이, 91세의 나이까지 전 세계 64개국을 순회하면서 자신이 고난 중에 배웠던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가지고 복음전도 순례자의 삶을 살아간다.
‘나의 집은 유대인들의 은신처가 되어주었는데, 수용소에서 나의 은신처는 어디란 말인가?’ 수없이 질문했을 것이다. 그러나 절망밖에는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감옥에서 그녀는 빛된 진리를 발견했다.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저서에서 그 신앙을 고백한다. 고난의 환경 속에서 피할 곳이 있다면 바로 주님이라는 것.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시61:3). 주님께 피할 때 주님은 그녀를 모른척하지 않고 지켜주었다. 주님께 피할 때 자신의 가족을 배반한 유대인도, 감옥에서 자신과 언니를 학대한 악질 독일 간수도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코리 텐 붐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증오와 이기심이라는 사슬에 채워진 채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우리 또한 감옥에 갇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라는 열쇠가 아니라면 이 감옥으로부터 자유해질 수 없다. 나도 여전히 거친 환경을 만나면 분노가 일어난다. 원망과 증오심이 스멀스멀 올라와 선한마음을 가둔다.
그러나 대개 귀한 것은 고난 중에 얻게 된다. 내가 직접 고난의 환경을 겪어보지 않고는, 증오라는 감옥에 갇혀보지 않고는 참된 사랑과 용서를 배우기 어렵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용서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증오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고난의 학교로 이끄신다. 우리 인간의 구조가 고통 중에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난 속에서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 씨름할 때 그렇게 배운 사랑과 용서는 진짜 능력이 된다.
나의 생활 가운데서도 피하고 싶은 괴로운 자리에 남아있을 때 주님께서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길, 증오와 이기심의 창살 안에서 주님을 찾을 때 그분께서 사랑과 용서의 열쇠를 공급해주시기를 기도드린다.

한빛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