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복되다
 
국어사전에서 지혜(智慧, 知慧)는,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 지혜라면 지혜로운 사람은 삶의 실패가 없을 것만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부분의 과정들을 보면 주어진 이치를 더디 알고,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그 일을 잘 알아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어리석음을 범하고 주변에 불편함을 줄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다가 실패의 나락으로 빠져 절망하고 포기하는 순간들로 이어진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지금 안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이라고 말하여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돌아보면 알아지는 것들, 지나가면 깨닫게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당면한 일에 목숨을 거는 순간도 우리에겐 부지기수다. 그만큼 지혜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인간에게 주님이 주시는 해답은 성경에서 지혜를 얻으라고 말씀하신다. 
흔한 예로, 우리가 어떤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해 실패를 당할 때 ‘바보 같다’는 비유적 책망을 자신에게 하곤 한다. 누군가에게도 마찬가지다. 지혜가 없다는 뜻이다. 그 지혜를 얻어서 살고 싶은데, 그 지혜가 잡히지 않아서 우리는 바보같이 살아갈 때가 많다. 안타깝게도. 

 
바보가 아닌 바보 이야기
“저 사람이 제 돈을 훔쳤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이반에게 판결을 내려달라고 찾아왔다. “그래? 돈이 필요했겠지 뭐. 그냥 줘 버려.” 이반이 말했다. 사람들은 이반이 바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몇몇만 모이면 쑥덕거렸다. “이반은 원래 바보였대, 바보.” 이 말은 들은 아내가 걱정이 되어 이반에게 말했다. “백성들이 당신을 바보라고 비웃고 있어요.” “그래? 실컷 비웃으라고 해. 나는 원래 바보였는걸.” 이반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Leo Tolstoy)가 1886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바보 이반’(Ivan the Fool)의 한 장면이다. 러시아 귀족들의 탐욕과 무위도식을 비판하고, 땀 흘려 일하는 농민의 삶을 고무하고 있는 이야기지만 많은 이들이 바보 이반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간단하다. 사람들이 지혜롭다고 여기는 일을 이반은 거부한다. 거부를 넘어서 거스르는 삶을 살았고 그래서 바보라고 불리지만, 사람들은 그 삶에 자신을 비춰보면 내면으로부터 반사되는 불편한 것이 생긴다. 나는 지혜롭고 이반은 바보인데 그 이반이 훨씬 바보 같지 않는 불편함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냥 줘. 그러라고 해. 나는 바보야. 인정하는데 정작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이반은 바보가 아닌 것이다. 그 답은 말할 것도 없이 성경에서 찾으면 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고전1:27). 누군가가 바보라고 말하면 그건 욕이다. 어릴 적 담벼락에 쓰인 바보란 낙서도 욕이었다. 그러나 이반의 바보스러움을 성경은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지혜롭지 않은 수많은 모순들이 나열된다. 
원수를 사랑하여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고 하시는 조금은 감당키 어려운 말씀,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데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는 모순된 말씀. 누가 달라고 하면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도 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동행하라는 비논리적인 말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시는 답답한 말씀 등등.  
삶의 방향과 목적, 가치관 전부가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와 정반대로 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보가 되지 않는 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버겁고 힘들고 지쳐서 쓰러질 것만 같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좁은 길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신다. 결정적인 말씀은 생명에 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버리고 포기하고 초월하여 사랑하는 드높은 가치를 가지라고 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이 모든 것의 결론이 된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내 것은 없다. 내 자아, 삶, 가정, 심지어 목숨도 없다. 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버리고 가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버림이 아닌 진정한 소유가 되는 것이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요한계시록 18장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지는 장면이 나온다. 성경은 바벨론을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라고 말한다. 바벨론에 모여 많은 자랑을 일삼던 이들은 이제 귀신의 처소에서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해야만 한다. 그들이 누리며 즐거워하던 때에, 예수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때와 공의를 기다리던 이들은 바보같이 하찮고 비참하게 여김 받으며 그들의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 이후 하나님의 때가 되니 상황은 역전이 되었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1-4).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거기서 나오라고 하신다. 거기서 나와 죄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럴듯해 보이나 결국엔 악이 승리할 수 없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보는 환경과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며 거룩하신 분이기에 주님이 승리하신다. 우리가 겪는 모든 복과 재앙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심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뜻을 어찌 다 이해하랴. 당연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환경과 상황이 나를 어렵게 만들더라도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을 믿고 끝까지 잠잠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 빠져 귀신의 소굴에 있길 원치 않으시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거기서 나오라고 간절히 부르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지혜는, 당신의 자녀들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이끄시고 보호하시는 사랑이다. 그래서 때론 아프더라도 죄에서 건져내야 하며 고통스럽더라도 치료와 회복을 위한 아픔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은 섭리와 이끄심에 순종하겠다는 뜻이다. 그 지혜를 얻게 하시려고 우리를 끊임없이 단련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함도 아니요 세상의 이치와 정세도 아니다. 내 이웃도 아니고 어느 단체도 아니다. 국가도 아니다.
이웃 때문에 분을 내지도 말고, 사회의 불합리함에 분노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의 비리에 속닥이지도 말고 누군가의 교만함에 거북한 맘도 느낄 필요 없다. 차라리 침묵하며 그들에게도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 가서 피하는 방법이 가장 좋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른 분별과 사랑이 담긴 기도가 필요할 뿐이다. ‘하나님께 피하오니 다스리소서.’ 한마디면 한층 더 지혜자로 서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