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길로 기꺼이 들어서라

한 달마다 갖는 정기 모임으로 23일간 태백 예수원을 다녀왔다. 해발 900미터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그곳에 가는 길엔 하늘과 금방이라도 맞닿을 듯 한 하얀 구름들이 우리를 반겼다. 4시간 가량을 굽이굽이 지나 산 중턱에 이르자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25:33)라는 글귀가 시선을 끌었다. 조금 더 올라가자 돌로 지어진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집은 중보기도의 집이자 수도자적인 삶을 추구하는 다양한 분들이 모여 사는 생활공동체다. 각각의 집마다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시온, 나사렛, 베들레헴 등. 방문객 카드를 기록하며 핸드폰을 바구니에 반납하였다.

집도, 하루 세끼 식사도, 화장실도, 옷들도, 그곳에서 거처하는 가족 공동체도 모두가 베들레헴의 가난함과 소박함이 묻어났다. 1급수 맑은 물이 흘러서일까 샴푸를 쓰지 않아도 기분이 상쾌했다. 이곳은 직분과 직책과 상관없이 모두를 형제, 자매로 부른다. 부르는 호칭도 높음이 없고 작고 가난하다. 절정은 그 다음날 아침 노동을 하고 난 뒤 간식이었다. 빵이나 초코파이나 요구르트 등 작은 기대를 안고 나사렛 집의 식탁에 앉았는데, 투박한 그릇에 담겨진 것은 강냉이뿐이었다.

하루 두 끼 식사와 채식을 하는 우리 집보다 더 가난하고 소박해 보였다. 문화적 혜택을 누리지 않아도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펼쳐놓은 자연과 더불어 뛰어놀고, 종소리에 맞추어 기도하고 밥 먹고, 종이 한 장을 받고도 기뻐하는,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한 곳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그곳에서 생활하신 J자매가 자녀에게 한 세 가지 권면도 따뜻하고 은혜로웠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좋은 공기, 좋은 물,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을 많이 만나는 축복을 받았단다.”

오전 6시에 새벽예배를 드리며 자유롭게 나눔의 시간을 가지는데, 작은 팻말에 촛불, 물음표,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촛불은 깨달음을 나누는 것이고, 물음표는 말씀을 읽고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것이고, 화살표는 오늘 하루 묵상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 형제가 설명을 해주었다. 세 가지 그림을 보며 하나님이 내 안에 촛불을 켜는 듯 했다. 그리고 물음표가 던져졌다. ‘너는 수도자라고 하면서 얼마나 단순함과 소박함을 갈망하며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고 있느냐?’ 어쩜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맑은 가난을 다시 회복하라고 이곳과의 만남을 허락하신 것 같았다.

얼마 전 일어난 숨겨진 이기심과 욕심을 보여주는 일이 떠올랐다. 몇 권의 신학서적, 여러 장의 A4 용지를 선뜻 기쁨으로 이웃에게 내어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스스로 옹졸하다고 여기면서도 약간의 껄끄러움을 지닌 채 한 마디 퉁명스럽게 내뱉고야 말았는데, 그 후로도 내가 아닌 상대방의 이기적이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고 마음이 어려워졌다. 마음의 가난을 잃어버리자 평화도 잃어버렸다. 수도자라는 부르심에 감격하며 거룩한 성인들의 삶을 본받아 청빈하게 살고자 했던 서원이 정말 무색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아주 작은 소유에도 쉽게 가난을 놓치고 하늘의 소박한 기쁨을 빼앗겨 버린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처럼 이 땅의 것은 모두가 주님의 것이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 것인 양 스스로 소유권을 주장할 때가 많다. 내 육신덩어리도 내 것이 아니다. 이 땅의 광활한 토지 중에서 우리는 한 줌의 흙으로 빚어진 티끌에 불과하다.

즐겨보고 좋아하는 책 중 하나가 가난한 자의 슬기. 어느 날 프랜시스는 시편 책을 가지고 싶어 하는 한 형제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자, 책을 가져다주겠다고 외치면서 은둔소의 부엌으로 달려 내려가 아궁이에서 재를 한 움큼 움켜쥐고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여기 시편 책이 있습니다.”하고 그 재를 형제의 머리 위에다 문지르면서 말했다. 형제는 예기치 못했던 이 일에 놀라고 당황했다.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는 학문이나 일반적인 소유권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인 자기로서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서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되고,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있음을 그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형제를 이해시켜 보려고 희망을 가지고 말했다. “형제가 시편 책을 갖게 되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락의자나 옥좌에 앉아서 무슨 위대한 고위 성직자처럼 다른 형제더러 당신의 시편 책을 가져다 달라고 할 것입니다.”

형제가 멋쩍은 웃음만 짓자, 가엾은 아이를 사랑스레 보살피듯 다시 그에게 말했다. “작은 형제여, 나 역시 젊었을 때 책으로 인해 유혹을 받고 그 책들이 나에게 슬기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몹시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책들은 슬기를 줄 수 없습니다. 슬기와 학문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마귀라도 전에는 천국의 것을 다 알고 있었고, 지금은 혼자가 전 인류가 합친 것보다 이 지상의 것을 더 많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시련이 닥칠 때, 유혹과 슬픔 속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책이 아니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뿐입니다. 지금 나는 가난하고 못 박히신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나 역시 가난하고 못 박히신 예수님을 잃어버리자 책 한 권에도 금방 이기심이 발동하여 상대방에게 방어막을 쳤다. 왕처럼 옥좌에 앉아서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려고까지 하였다.

사람은 크든 작든 드러나는 어떤 소유를 가지고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방어할 태도를 취하게 된다. 프랜시스는 만일 우리들이 어떤 것을 소유하고 싶으면 그 소유물을 지키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은 많으나 청빈(淸貧)한 자는 적다. 청빈의 참된 의식은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난을 사랑하는 것이다. 마음에 소유가 없어지면 삶에 평화가 온다. 반면 지극히 작은 욕심이라도 마음에 품고 있으면 평화는 금방 깨지고 만다. 천국은 마음이 가난한 자의 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도 자기 권리나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마음의 평안과 온유함을 지닌 자가 하늘의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주님의 맑은 가난을 닮을수록 하늘과 더 가까이 맞닿게 될 것이다. 벌거숭이 십자가를 벌거벗고 따르는 길이야말로 주님의 가난을 온전히 따르는 길이다.

조찰하신 하나님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듣지도 찾지도 생각하지도 숨 쉬지도 만족하지도 기뻐하지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맙시다.”

이 밤 나의 이기심과 욕심을 주님 앞에 내려놓기를 눈물로 간구해 본다. “오 주여 나에게 가난함을 주소서. 오 주여 나에게 겸손함을 주옵소서. 빈 가슴으로 드리니 사랑으로 채우소서.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 주소서. 주여! 빛이 되어 오소서.”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