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영혼아 깨어라         
   

1992년 10월 28일 한국은, 재림의 주님이 이 땅에 오신다는 날이었고 그 후유증은 실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낳았었다. 수많은 가정들이 파탄되었으며 직장과 학교를 떠났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시한부 종말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무슨 전염병이라도 되는 냥 교계의 미움을 받았고, 재림이라는 단어를 들먹이는 교회와 개인은 당연히 불온한 신앙인으로 의심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휴거로 한바탕 소란이 있은 다음 날인 10월 29일자 각 신문에 다음과 같은 광고가 지면을 덮었다. “지구의 종말은 오지 않습니다. 오늘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읍시다.” 이 광고는 17세기 합리론의 주요 이론가인 네덜란드의 유대인 철학자인 스피노자가 한 유명한 말인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것을 인용하여 지구의 종말이 오지 않았으니 스피노자의 말처럼 오늘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며 묵묵히 나의 일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 광고를 보고 시한부종말론에 질린 많은 사람들은 머리를 끄덕거렸을 것이다. ‘맞다. 종말은 무슨 종말이냐, 어제 그렇게 종말이 온다고 떠들어대더니 종말이 오긴 무슨 종말이 왔느냐. 우리 모두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며 나에게 맡겨진 일을 하며 그렇게 살자.’ 분명 종말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종말에 신경 쓰지 말고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자는 지극히 타당한 말에 기독교인들까지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다시 부는 바람

그런데, 우리가 10여년을 안일하게 살고 있을 즈음, 하나님은 또 한 번의 경고를 터뜨리시며 무언가를 얘기하고 싶어 하셨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오신 데이비드 오워 박사님의 예언이 한국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회개하지 않으면 전쟁으로 치시겠다는 엄청난 하나님의 경고 메시지는, 기복신앙과 성적타락에 만연하게 젖어가던 교회와 사회를 술렁이게 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를 알려주는 것이기에 대부분의 교계는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죽이고 회개를 선포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는, 사탄의 엄청난 계략에 속아왔다. 사탄은 시한부 종말론이라는 것으로 사람들의 모든 것을 뒤 흔들어 놓더니 그것이 거짓으로 확연히 드러나 버리자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종말이 없다고 세뇌시키고 있었다.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 외치던 종말은 있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말씀 하신 종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이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 에 대한 막연함은 모든 삶을 세상과 타협하고 마귀의 정욕에 가볍게 내어주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은근슬쩍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된 재림에 대한 안일함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종말은 없다고 말하며 교묘히 현혹시키고 말았던 것이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할 우리 신앙인들조차도 사탄의 교묘함에 속아 안일한 태도를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파와 수금의 삶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깨어 있는 삶은 거창한 삶이 아니다. 하나님은 크거나 작거나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주시는 삶을 통해 우리를 정결하게 만드시려는 것이 최종 목적이시다. 그래서 고난이라는 이름의 선물을 주시는 것이다. 환난 고통은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시험하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진짠지, 가짠지, 알곡인지, 쭉정이인지, 모래 위의 집인지 반석 위의 집인지, 선한 목자인지 삯꾼 목자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알곡인지 쭉정이인지는 까불어 봐야 아는 것이다. 알곡은 까불면 까불수록 바싹바싹 까부는 사람에게로 들어가고, 쭉정이는 바람에 다 날아가고 만다. 반석 위의 집인지는 모래 위의 집인지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장마물이 나 보아야 아는 것이요, 선한 목자인지는 이리가 와 보아야 아는 것이다.

평안할 때에야 누구인들 잘 못 믿으리오. 환난 풍파가 참 신자에게는 더욱 더 유익이 되는 것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시 119:71)하였다. 꽃송이가 세찬 가시에 찔리면 찔릴수록 향기가 더욱 나듯 환난 중에도 감사와 기쁨의 향기를 잘 드러내는 성도가 진실한 성도가 되고 깨어 있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


이세종 선생님은 성경 한 구절 읽으시고는 그대로 실천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성경의 예수님과 삭개오의 사건을 읽고는 회개한 후 그때까지 남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모조리 갚았다. 전에 남의 집 콩잎을 따먹은 것이 생각나서 그 주인을 찾아가서 사과하고 몇 배로 보상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머슴살이를 하면서 얼마나 돈을 모았던지 백마지기 가까운 큰 지주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나니 그것이 후회스러워, 토지를 헐값에 빼앗긴 사람들이 얼마나 원통했겠느냐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기가 땀 흘려 번 재산만 남겨놓고는 모든 것을 원 주인들에게 조건 없이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철저히 믿어야 한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게 믿어선 안된다. 성경에 가르치신 대로 실행해야 한다.”고 하며 빚 문서 보따리를 안고 마을에 나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돌려주었다.

타협이나 합리와 명분화가 없이 그저 성경 그대로 실천하신 이 세종 선생님은 성경에 쓰여진 그대로 익은 열매가 되셨다.

이성봉 목사님께서 제주의 피난 성도들을 찾아 수개월간 순회 전도할 때의 일이다. 마지막 몽비포 군인 강병대 교회에서 집회하고 나니 비행기를 태워 준다고 하였다. 그런데 헬기를 타려면, 군용 헬기이므로 민간인은 불허라 형식상으로라도 군복을 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양심이 불허하였다. 나는 군인이 아닌데 왜 가장을 할 것인가? 단연 사절하고 배로 18시간을 걸려 가시게 되었다. 풍랑 중에 배 멀미를 심하게 하며 극히 어려울 정도였다. 조금만 눈감으로면 너무나 편안한 삶이 된다. 그런데 그것은 밝은빛이 아니기에 그럴 수 없다. 잠깐의 어둠으로 육신은 오래 편할지 몰라도 영혼은 어둠속에서 잠을 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락을 기꺼이 물리치신 것이다.

너희는 언제 그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항상 조심하고 깨어 있으라(막13:33)


깨어있는 삶을 찾아

사탄은 이미 자신의 수하가 된 세상 사람들을 삼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을 틈만 나면 넘어뜨리려고 오늘도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고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깨어있는 신앙은 성경적인 종말관과 밀접하다.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은 분명히 있으며 그것은 깨어있는 신앙인이 누리는 축복의 메시지다. 따라서 건전한 성경적 종말론을 따라 깨어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넘어서서 언제나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이 바로 깨어 있는 신앙이다. 성경대로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삶을 말한다. 성경적인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주님중심의  삶을 충실하게 살면 그것이 재림대망의 신앙이며 깨어 있는 삶이다. 종말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할 필요도 없다. 말세만 기다리고 현세를 기피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새 생명의 출발이며, 지금은 상급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하는 기회이다.

성경의 위인들과 성자 성녀들의 삶을 보면, 깨어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의 영적인 방법을 터득해 실천했다. 절제, 선교, 봉사, 청빈, 설교 혹은 철저한 자기 비움의 삶 등이었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그것을 보고 듣고 실천할 기회를 부여 받았다.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거룩한 모방을 하면서 익은 열매의 길로, 깨어 있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세속에 찌들어 있거나, 영성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고단함 중에 있거나, 혹은 연단 중에 지친 내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은 우리 주님 품이다. 그분이 주시는 자유는 언제나 달콤하고 신비하다. 그것이 비록 고통일지라도.

자! 깨어나고 싶은 영혼들이여. 주님에게 다가가 고요히 말씀 드려보자. 주님, 저 왔어요.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주님의 자비가 풍성하게 임할 차례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