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인님을 위한 삶

어느 날 밤, 기도회가 끝나고 나오는데 한 아이가 다가오더니 말한다. “선생님은 왜 이렇게 키가 작으세요?” 순간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나오는 대로 대답을 했다. “그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하나님께 여쭤보렴.” 대답해 놓고 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당황스런 질문이긴 하지만 처음 들어본 것은 아니다. 한창 예민했던 고등학생시절, 주일학교 교사를 하다가 같은 질문을 받고 꽤 오래 상처로 남았던 기억이 난다. 145센티미터에 발 215밀리미터. 아직까지 나보다 더 작은 성인여성을 만나본 적은 없다. 중학교 때는 유독 친구들보다 작고 앳된 외모 때문에 괴롭힘 아닌 괴롭힘을 받기도 했다. 나이가 많고 덩치가 큰 같은 반 친구들이 귀엽다며 구석에 몰아넣고 괴롭혔는데, 처음엔 장난이었지만 반복되다보니 진짜 괴롭힘으로 다가와 한동안 힘들어 했었다.

‘내가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을까?’ 고민 하다가 나를 이렇게 낳으신 어머니를 원망도 해보았다. 하지만 어머니도 나를 선택해서 낳은 건 아니다. 낳아보니 이렇게 생긴 아이가 태어난 것뿐이다. 생각해보니 내 인생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게 주어졌다. 남들보다 못난 외모도,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도, 목회자 가정도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44:2).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나를 만드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 아이에게 얼떨결에 했던 대답처럼 나는 왜 내 키가 작은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내 인생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3:13)라고 말씀하신다. 속량이란 몸값을 받고 종의 신분을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값을 지불하시고 나를 사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 내가 만든 혹은 산 물건이 나를 위해 쓰임받듯, 하나님이 만드신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너는 특별하단다」 라는 동화가 있다. 나무로 만든 사람들의 마을에 사는 펀치넬로의 몸에는 언제나 잿빛 점표 투성이다. 그 마을에서는 재주가 많거나 나뭇결이 잘 칠해진 사람에게 금빛 별표를 붙여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잿빛 점표를 붙여준다.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고 잘 생기지도 못한 펀치넬로는 늘 몸에 잿빛 점표를 붙이고 다닌다. 금별을 하나라도 얻기 위해서 애써보지만 벌점만 더 늘어나기 일쑤다.

그런 펀치넬로에게 루시아라는 아이가 찾아온다. 신기하게도 루시아의 몸에는 금빛 별표도, 잿빛 점표도 보이지 않는다. 벌점을 붙여 주려해도 루시아의 몸에는 붙지 않는다. 그런 루시아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펀치넬로에게 루시아는 거인 목수 엘리를 찾아가라고 가르쳐준다. 혹시나 엘리도 점표 때문에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가길 망설이지만, 결국 펀치넬로는 엘리를 찾아간다.

엘리는 자신을 찾아온 펀치넬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펀치넬로, 나는 너를 만든 엘리다. 나는 네가 오길 기다렸단다. 너는 내게 특별한 존재지. 사람들이 너에 대해 말하는 건 중요하지 않단다. 사람들이 너에게 붙여준 점표는 네가 그것을 신경 쓰기 때문이란다. 네가 나를 신뢰할수록 그 스티커는 의미가 없게 되지, 너는 표가 많이 붙어 있으니 날마다 나를 찾아 오거라. 꼭 기억하렴, 나는 쓸모없는 것은 만들지 않는다. 내가 너를 만들었고 너는 내게 특별하단다.

펀치넬로는 엘리를 만난 후 더 이상 금빛 별표를 구하러 가지 않았다. 왜냐면 자신의 가치는 자신을 만든 목수 엘리에게만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와 펀치넬로는 같은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우리 인생도 주인을 바로 만나지 못하면 자신의 참된 가치를 깨달을 수 없고,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주인을 떠난 세상에서 붙여주는 별표와 점표는 헛된 허영심과, 몹쓸 자괴감만 줄 뿐이다.

책상의 물건들을 바라보며 주인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목마를 때 쓰기 위해 놓아둔 깨끗한 물 컵, 땀이 날 때 닦기 위해 깨끗이 빨아둔 손수건,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준비된 하얀 메모장들이 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 원하는 자리에서 깨끗한 모습으로 준비된 것에 대한 기쁨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모두가 잠든 밤, 잠자리에 눕기 전 가만히 눈을 감고 주인님을 불러본다. 주인이 누구신지, 나를 놓아두신 자리가 어디인지,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내 마음대로 살아왔던 부끄러운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주인님을 불러본다.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주인님의 눈빛이 느껴진다. “주인님, 주인님 앞에서만 제가 가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또 사람들에게서, 헛된 세상 것들로부터 저의 가치를 발견하려고 애쓰며 살았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주인님이 원하시는 자리에서 주인님이 쓰시기 합당한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기를 원합니다. 주인님,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 사랑합니다.

박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