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기도처에는 작은 화목 난로가 하나 있다. 거리에 지천으로 버려져 있는 나무 팔레트를 뽀개어 땔감으로 쓰는데 연료비가 안 들어서도 좋지만, 난로에 던져 넣은 나무에 불이 붙는 순간을 나는 좋아한다. 처음엔 매캐한 연기만 나다 어느 순간 확 불이 붙을 때, 연기는 쏜살같이 연통으로 빨려 들어가 쫓기듯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물이 어는 빙점이나 끓는 비등점처럼 착화점이 있나 보다. 그때가 되면 죽어가던 불씨들도 벌겋게 반짝거리며 곧 있을 은총을 예감하듯 점점 더 달아오른다.

볼 때마다 이는 내게 성령의 신비로운 착화를 연상케 한다. 불이 꺼져가듯 영혼이 메말라갈 때, 주님 사랑이 확인되지 않아 애를 태우다, 원인이 나의 육적인 생활에 있음을 깨닫고 은혜를 구하며 뭐 하나라도 그 나태함을 청산하려 할 때, 성령은 놀랍게도 심령에 다시 불을 붙이신다. 

맵고 독한 연기만 뿜어내다 끝내 불이 붙지 않을 때도 있는데, 더 답답한 건 바로 진실한 회개와 돌이킴이 안 일어나는 때다. 붙잡고 있던 소유들, 악습이나 정욕적인 어떤 즐거움이나 포기한 개선 의지 등을 아직도 그냥 두는 것이다. 어찌 이리 미련한지…. 눈이 따가워 눈물만 나고, 그것이 또 속상해 화가 나고, 스스로 비난과 멸시를 한다.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처럼.

하지만 주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애만 태우는 연약하고 미련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은혜를 뿜으시면, 난로의 불처럼 "확" 하고 사랑의 불길이 일어나는데, 그때부터 시작되는 불꽃의 향연은 황홀하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불의 춤은 빛과 열을 내며 모든 것을 태워 재로 만들고 하늘로 오른다. 바람이 세찬 날이면 남는 재마저 극히 적다.

자애심으로 인한 아픔들. 남과 비교하며 갖는 열등감이나 우월감, 타인의 비난으로 인한 억울함이나 분노, 칭찬으로 인한 만족감이나 자랑스러움, 실수로 인한 비관이나 자학, 성공으로 인한 성취감이나 선민감, 의욕으로 인한 주장이나 아집들…. 이런 것들이 매캐하다. 교만이 무럭무럭 자라는 줄도 모르는 소경이요, 애타게 기다리며 부르시는 주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다.

봄에는 폭증하는 미세먼지로 야단법석이다. 하지만 영혼 속 먼지가 가득한 건 별 관심이 없다. 마스크만 잘 쓰고 손만 잘 씻으면 안전한 줄로 안다. 하지만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문제는 내 안에 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9~20).

아, 불이 붙어 "확" 하고 다 태워져야 한다. 세찬 바람이 불어 다 날려버려야 한다. 성령의 불이 붙어야 뜨겁게 살 수 있다. 주님 사랑의 불길에 접촉되어야 다시 빛과 열을 낼 수 있다. 착화는 나무 스스로 되지 않는다. 원불(源火)에 닿아야 옮겨붙는다. 그때까지 매캐한 연기는 견뎌야 하고 끝까지 포기해선 안 된다. 애를 태우며 간절히 불이 붙여지길 소원하며 기다려야 한다.

불이 또 꺼지려 한다. 태울 나무 조각을, 재로 날려버릴 화목을 또 넣어야겠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