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이란 단편소설이 있다.

옛날 부유한 농부가 살았는데 그에겐 아들 셋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세미욘, 타라스, 그리고 이반이었다. 그리고 마리니야라는 청각장애인 딸이 하나 있었다.세미욘은 군인으로 성공을 했고 타라스도 돈을 벌어 출세를 했는데 이반은 장애인인 누이와 함께 집에 남아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이반은 형들처럼 돈도 명예도 없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그저 소박하게 살았다. 그래서 욕심도 없고 아무 근심도 없는 것 같은 이반에게 사람들은 ‘바보’ 라고 불렀다. 이 소설은 무엇이 참된 삶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한 것인가를. 모두가 풍요롭기 원하고 누군가를 다스리고 지배하기 원하는 세상에서 묵묵히 참고 인내하며 자기 길을 조용히 가는 사람은 자칫 바보라고 놀림을 받는다.

누군가는 자기의 길이 가장 옳다고 강력하게 항변한다. 누군가는 자기의 삶이 만족스럽다며 아무도 부럽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답은 성경에 있고 예수님의 삶을 따르던 분들의 삶이 그것을 증명 한다.

사도바울의 삶을 보면, 예수님 믿는 이들을 잡으러 다니는 지극히 주님과 상반되는 삶이었다. 그가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바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자신이 알던 지식이나 나름 율법적인 완벽한 삶 전체를 오히려 ‘바보’로 단정 짓고 배설물로 여기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알기 전과 후로 나누어진 삶은 극과 극으로 달라졌던 것이다.

예수님을 알고 난 이후도 더 가치롭고 유익하게 살기 위해 삶을 재정비하고 달라진 분들도 많다.  주님만을 사랑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고 친구를 떠나고 세상을 떠나는 이들도 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바보라고 부른다. 세상을 따라가야 하고, 명예를 추구해야 하는데, 왜 혼자만 잘난 체하면서 바보 같은 삶을 택하는지 알 길이 없는 사람들 취급한다.

부유한 아버지를 따라 살면 얼마든지 풍부했을 프랜시스가 청빈의 길을 갈 때도 사람들은 이해 할 수 없었다. 방탕의 길을 가다가 그저 그렇게 살아 마땅한 어거스틴의 변화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변화를 이루어 신학자가 되고 예수님을 위한 전 생애를 살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모두가 똑같은 삶을 살라고 하지는 않으신다. 각자의 길을 가되, 목적과 방향이 가장 거룩하길 원하신다. 거룩한 길을 향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길 원하신다는 것이다. 어떤 이의 길도 ‘바보 이반’ 으로 폄하되거나 판단 받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가장 공평하고 진실하게 각자의 삶을 따라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바보’는 주님에게 푹, 빠진 사람들이다. 겉모양이 아닌 삶이, 주님을 닮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주님의 바보들이다. 우리가 다 추구해야 하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