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를지 거부할지를 선택할 수 있는 전제로서 부여받은 것임을 창세기는 낱낱이 보여준다.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최초의 피조물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과 명령을 받는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따먹어도 좋다.”는 허락과 “다만, 선악과(善惡果)는 따먹으면 안 되고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아담은 명령을 어겼고 그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임의대로 즉, 자유의지에 의해 명령에 불순종했음을 말씀하시고 명령에 불순종한 결과가 당연한 것임을 직시하게 하신다. 

수많은 이들이 에덴동산 사건에 대해 하나님께 불만을 제기한다. 과거 청년들과 토론을 하거나 대화를 할 때도 그들은 늘 하나님을 불만 대상으로 여기며 자신들의 생각을 늘어놓곤 했다. “왜 에덴동산을 만들어서”, “왜 선악과를 먹게 했느냐”, “죄를 짓게 만들어서 쫓아낼 거면 왜 인간을 만들었느냐”는 결론으로 항변을 마무리하곤 했다. 그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얼마나 인간중심의 생각인지 허술한 논리의 비약이 가득한 말들임을 단숨에 알 수 있다. 

왜 에덴동산을 만들고, 왜 선악과를 먹고, 왜 인간을 만들었는지를 왜 하나님이 답해야 하고 억울함을 뒤집어쓰셔야 할까. 하나님은 말 그대로 한 분이신 창조자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창조 질서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영역에 대해 그분이 주권자시다.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하시며 피조물인 인간에게 최고의 자격을 부여해 주신다. 그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것은 심지어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 절대 순종의 영역이었다. 농담으로라도 선악과를 가지고 하나님께 불만을 제기할 조금의 이유와 명분도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였고 “예수 외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고도 말씀하신다. 이는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누릴 진정한 자유는, 행할 의지는 예수님 안에서 온전하여 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요3:16)고 하셨다. 대속의 은혜와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고 약속하시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신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내 맘대로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면 그것은 방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의지적 불편함, 억울함, 혹은 괴로움은 선한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열심이다. 우리의 모든 수고는 낙심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는 말씀을 붙잡고 내 자유의지는 하나님에 의해 구속당하기를 진정 기뻐해야 한다. 


자기부인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마16:24)는 말씀에는 내 자유의지도 포함된다. 다른 말로 ‘자아를 깨뜨리는’(눅9:23)것까지도 더해진다. 내 자유의지는 자기를 부인해야만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낼 수가 있다.  

구약은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수 없이 경고한다. 선지자들은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며 우상숭배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합일을 방해하는 최고의 악임을 소리쳐 말한다. 

신약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은 ‘내 의지’로 살아가려는 인간의 본성과 싸워 끝끝내 ‘자기 부인’을 이뤄내신 완전한 순종을 보여주신다. 그것은 오늘 우리도 내 의지를 부인하고 승리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거룩한 십자가의 좁은 길을 달려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는 것을 성경적 삶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엔 내 자유에 의한 대로 사는 것이 아닌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 제시되어 있다. 그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에게는, 내 안에 가득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내 안에 가득한 죄성과 정욕임을 성령께서는 알게 해 주신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밝은 빛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길은, 나를 죽이는 ‘자기 부인’의 길이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 지는 길이다. 

그 길을 걷는 자는 주님이 주시는 이길 힘과 용기가 주어진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 앞서서 그 길을 가셨고 우리에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자기의지를 주님께 드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의 길은 세상을 이길 담대함이 주어지고, 이는 세상이 줄 수도 알 수도 없는 참 평안을 선물 받게 된다. 

 

영광의 순종

누가복음 1장에는 자기를 부인하고 주의 말씀 앞에 자기의 의지를 온전히 드려 위대한 순종의 결과를 보여준 순종의 여인 마리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마리아는 처녀였기에, 자신이 아들을 낳을 거라는 천사의 예언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쉽지 않은 받아들임의 시간 앞에 서야 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고난을 동반하는 것임을 직감할 수 있는, 자기의지로써 당장 거부하고 싶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모든 두려움과 불안함을 물리친 후 곧바로 대답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천사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자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라고 하면서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를 그대로 내려놓고 순종을 선택한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돌게 된 것은 그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자기부인의 길로 들어선 곳엔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리고 순종의 열매가 영광스럽게 맺힌다.  

세계에 흩어진 여러 가지 선교 기관 가운데 “위클리프 성경 번역회”라는 선교기관이 있다. 그들은 신앙에 투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어학에 특별한 재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남미나 아프리카나 조그마한 나라 부족들이 모여 사는 곳에, 쓰는 말은 있어도 글이 없는 그곳에서 그들은 언어를 만들어 준다. 그래서 그 언어를 가지고 성경을 번역한다. 한 사람이 마태복음을 번역하고 죽으면 누군가가 뒤를 이어 다시 그곳에 좇아가서 마가복음을 번역하고, 또 죽으면 다음 사람이 가서 사도행전을 번역한다고 한다. 

이 선교회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 하나가 남미의 어떤 마을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성경 번역을 하다 보니까 그 마을 언어 가운데 “순종”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마을에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그 일을 꼭 하라고 하면서 “꼭 해야 된다.”는 뜻으로 말을 하는 가운데 계속 강조하는 것을 보았다. “그 일을 꼭 해야 된다. 네 모든 마음으로”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심부름 가는 아들 뒤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네 마음을 나누지 말라.” 그래서 “순종”이라는 단어를 번역하기를 “마음을 나누지 않고 모든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길게 번역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나의 의지가 하나님이 아닌 것을 추구하여 때론 탐하고 그래서 죄악의 길에 가려고 하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처럼 말하라.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래서 마음을 누구와도 나누지 않고 오롯이 주님께 드리는 순종의 열매가 내 삶에 맺어지도록 하라. 그 순간 내 마음은 주의 평안과 기쁨으로 온통 채워질 것이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