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속에서 5분 남짓한 그 시간에 그렇게 많은 자랑을 쉬지 않고 하는 여인을 보았다. 주식이 상한가를 친 게 3개나 있어 손쉽게 1억을 벌었고, 딸에게 강제적으로 집을 사라 해서 2년 만에 5억을 남겨줬고, 누구에게도 코치해서 매일 10만 원씩 입금되게 했다고, “이 좋은 머리 어따 쓰겠어. 이런 일에 써먹어야지 히히히.” 모든 일이 잘되어서 행복해 죽겠단다. “그런데요, 그렇게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나요?” 뭐 선교도 하고 교회에 헌금도 하고, 그분이 하는 선교는 한 달에 5만 원 정도인데, 기분 나쁘면 끊고 다시 맘 풀리면 하는 ‘자기맘 선교’다.

그는 스스로 국내 최고라는 신학대도 나와 남편과 전도사 사역도 했다. 그러다 설교가 너무 부담되어 그만두고 세상으로 뛰어들어 수십억의 재산을 일궜다. 지금은 남편과 별거 중이고 삶의 모든 초점은 오직 늘어나는 돈과 자랑에 집중되어 있다. 어떻게 이렇게 불쌍할 수가 있을까.

사도 바울을 좇아 선교를 다니던 ‘데마’는 감옥에까지 함께 한 제자였으나 마지막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스승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며 복을 걷어차 버렸다. 행복이 그런 곳에 있을까.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그가 천국을 얻을 것임이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셨다.

주님이 주시는 행복은 세상 것으로 잠깐 누리는 허망한 것이 아니다. 항상 영원한 천국과 이어진 복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복이다. 세상적인 것들은 부끄러워 초라해지는 빛나는 행복이요, 욕심스럽게 긁어모음이 아닌 버리고 나누고 드리는 행복이다. 무엇보다 이 신령한 행복은 주님 옆에서 듣고 배우며 닮아가, 종국엔 주님과 하나 되어 그 안에 사는 행복이다. 창조주요 구세주인 주님 안에서 영원히 사는 삶은 얼마나 복될까. 참 자유를 누리며 참 기쁨과 참 평화를 누리는, 모든 애정과 욕망으로부터 자유하며 오직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에만 집중된 그는 주님의 진짜 신부이다.

그녀는 정치 당파에도 뛰어들어 싸우며,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다 선하니 누리자고 무절제하며, 자랑거리라곤 통장과 집과 땅들이다. 얼마나 더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이제 곧 죽을 땐 얼마나 억울할까. 그리고 무조건 천국행이라 믿었던 엉터리 믿음이 발각되는 심판대 앞에선 또 얼마나 황당해하며 분노할까. 그때 누구를 탓하랴. 전도사 직분도 거쳤으니….

짙게 물드는 단풍의 고귀한 희생을 알까, 낙엽을 떨구며 봄을 기약하는 나무의 행복을 알까, 그 좋은 하늘을 뒤로하고 떨어져 세상을 순결한 빛으로 바꾸는 눈송이의 행복을 알까, 이제 다시 봄기운이 피어날 때 죽은 것 같던 만물이 생기를 얻어 일어나는 그 황홀함이 주님한테서 오는 행복임을 알까, 모든 것이 완전히 뒤바뀌는 죽음 이후의 심판과 영생이 지금 하나씩 준비되고 있음을 알기나 할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왜 행인과 나그네라 하셨는지, 왜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셨는지.

예수님의 마구간과 나귀 새끼와 버림받은 십자가와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이 실로 행복하다. 이 세상이 아닌 천국을 사모하며 차곡차곡 준비해 가는 이들이 참 행복자다. 왜냐면 허망하게 사라져갈 수 없는 행복을 심령 속에 부으시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만물 속에서 주님을 보고 주님과 함께 사는 참 행복을 누린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