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주님과의 진한 첫사랑의 뜨거움을 계속해서 가지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앙의 길은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르게 흘러간다. 잘 가고만 있는 줄 알았는데 뒤돌아보니 곁길로 왔음을 깨닫기도 하고, 가깝게만 보였던 길을 뱅뱅 돌아서 가기도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뜨거운 때 가장 쉽게 빠지는 오류는 내가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착각이다. 그때의 우리는 은혜로 강력히 붙잡아 주시는 손길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깊은 죄의 구덩이에 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초라한 실력과 마주하게 된다.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서 유명한 간증 채널을 즐겨보는데 한 여배우가 나왔다. 6년 전 그녀는 간증 프로에 나와서 자신있게 선포했다. 나는 크리스천 하나님의 배우라고. 모태신앙이었지만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던 그녀는 공황장애와 술과 담배 중독에까지 빠지며 깊은 절망 속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된다. 그때 하나님을 뜨겁게 만난 이후, 주변 사람들이 다 놀랄 정도로 변화되었다.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주일에는 재충전이 필요하니 촬영을 피하게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될 줄 알았다. 

섣부른 판단이었을까. 그녀는 전에 가지고 있던 죄 문제에 또다시 넘어지고 만다. 수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연예인이었고 이미 교회에서 리더가 된 그녀는 자신의 연약함과 어려움을 주변에 나눌 수 없었다. 고민하던 중 한 선배 신앙인을 찾아갔다. 자신의 죄와 마음을 솔직하게 나누었을 때, 선배는 다른 어떤 말도 없이 “참 힘들었겠다. 기도할게.”라고 해주었다. 그리고 잊을만 하면 한번씩 메시지가 왔다. “기도하고 있어, 잘 될거야.” 

처음엔 그저 형식적인 인사인 줄 알았는데, 일주일에 한번, 3주간에 한번, 한달에 한번 계속해서 오는 메시지를 보며 진심을 느꼈다. 그리고 선배는 연예인 성경공부 모임에 초대했고, 모임을 참석하면서 어느새 회복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며, 이제는 누구도 정죄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할 수 있어, 그거 왜 못해?”라고 다그치거나, “이렇게 해봐!” 하면서 정답 같은 말은 건네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무조건 상대를 응원해준다고, 6년 전 달뜬 목소리와는 달리 깊어진 눈동자로 고백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비교적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목표지향적인 천성 때문인지, 목회자의 자녀라는 환경 탓인지 어느새 나는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강한 틀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나 타인에게 도덕적 의무감과 신앙적인 성숙을 요구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신앙의 공동체에 속한 뒤에는 그 기준이 더 강해졌다. 누구든 나이면 나이에 맞게, 직분이면 직분에 맞게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내게 가끔 톡 쏘는 가시가 있어 편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에도 나는 당연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이냐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인간이 한없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구덩이 속에서 헤맬 때였다. 내 취약한 기질과 몸에 새겨진 악습은 자꾸만 넘어지게 했다. 이번에야말로 온전히 끊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악습에 빠지는 나를 보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인간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이제는 무기력이 나를 엄습해왔다. 게으른 삶에 곧 하나님이 진노의 매를 드시지 않을까 두려웠다.

어느 날 새벽, 하나님은 한 말씀으로 내게 말을 거셨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분명 무서운 책망을 하실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주님은 이 말씀으로 나를 깊이 위로하셨다. 연약함을 동정하신다는 말씀에서 멈추어 주님의 마음을 귀 기울여 들어 보았다. “내가 너를 안다. 너의 연약함을 안다. 나 또한 너와 같은 ‘육신’을 가져보았기 때문이다. 환경이나 상황에 그토록 취약한 기질이 내재되어 있고, 악습이 배어들기 쉬운 그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봤기에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너는 내가 너를 깊이 동정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와서 먼저 내 사랑을 누리라. 그런 뒤에 그 사랑으로 이웃을 바라보라. 신앙의 성숙은 너의 할 일을 정확하고 빈틈없이 이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는 나의 마음을 닮는 데에 있다. 네가 가야 할 길은 사랑과 자비인 나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다.”

잘못 든 길이었다.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혹은 외적인 능력을 쌓아 신앙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 방향은 아니었다. 마치 하나님이 맡긴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만 칭찬하고, 종의 아픔에는 관심이 없는 고약한 주인인 줄로 착각했던 것도 분명한 곁길이었다. 주님의 길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고, 그 길은 곧 사랑과 자비로 쓰인 길 아닌가. 다시 천천히 돌아가 보자. 처음 주님을 만났던 때를 생각하며 천천히 걷노라면, 그 따뜻한 사랑과 긍휼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그 사랑 안에서 다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고 싶다. 

박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