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신학생이 준 빠다코코낫 한 조각을 먹는데 30년 전 수도원을 처음 시작할 때 탁발 전도하다 먹었던 비스킷이 떠올랐다. 수도사 일곱 명이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처럼 먹을 것, 입을 것, 아무것도 없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도원에서 출발하여 충남 대천까지 며칠을 걸으면서 갔다.

밤에는 교회나 이웃집 신세를 지고, 식사 때는 집마다 돌아다니며 검정 비닐봉지에 식은 밥과 반찬, 국 등을 한곳에 넣어 논두렁에서 앉아서 나무젓가락으로 끼니를 때웠다. 며칠을 걷자 형제들이 지칠 대로 지쳐서 걸을 힘도 쉴 곳도 없어 밤늦게 어느 교회 문이 열려있기에 들어갔다. 배낭을 멘 채로 일곱 명이 서로 엉켜 잠에 곯아떨어져 자고 있는데, 새벽에 큰 소리가 들렸다. “아니,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야?”하면서 사관 복을 입은 어떤 여자분이 호되게 야단을 치면서 당장 일어나라고 하셨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기에 그대로 앉아서 새벽예배를 드리고 바로 나왔다. 

허기진 배에서 꼬르륵 천둥소리가 났다. 대천휴게소 근처에 일곱 명이 넋을 놓고 앉아있는데, 쓰레기통에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순간 빠다코코낫 겉표지가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지를 걷어내고 과자봉지 안을 보니 먹다 담은 비스킷이 일곱 개가 있었다. 눅눅하게 녹은 것이었지만 먼지를 입으로 후후 불어내고 하나씩 함께 나누어 먹었다. 담뱃재 냄새도 배어있었지만 꿀맛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비스킷 한 조각에 눈이 떠지고 힘이 약간 생겨났다. 내친김에 쓰레기통을 또 뒤지니 흐물흐물한 김밥과 음료수가 보였다. 결국은 다른 휴지통도 다 엎어서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 휴게소 안쪽에서 한 아주머니가 나오더니만 “왜 남의 쓰레기통을 엎고 난리야.” 하면서 호통을 치면서 빨리 다 담으라고 하셨다. 당시에는 쓰레기 분리수거가 시행되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 우리가 쓰레기를 분리해서 깨끗이 정리하고 청소까지 말끔하게 해놓자 나중에 주인이 오셔서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면서 뜻밖에도 정중하게 식사를 차려 주셨다. 우리와 대화를 나누시더니만 자신들도 장로와 권사라고 하면서 돈과 선물을 한아름 주시길래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서 즉시 돌려드렸다. 휴게소 사장님이 다음에 지나는 길이 있으면 꼭 방문하라고 몇 번 인사하셨다. 30년 전 휴게소에서 먹었던 그 비스킷의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한없이 낮아져야 하는 고되고 힘든 길이었지만, 너무 행복한 체험이었다.

올해도 어느덧 뒷산의 붉게 물들었던 나뭇잎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조금 남은 잎들이 겨울 찬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담장 넘어에서는 김장한다고 배추를 다듬고 소금에 절이는지 창가로 자매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수도 생활 30년 동안 울고 웃으면서 살아온 모든 날이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다. 훌륭한 믿음의 어른들, 성화된 성도들, 나의 영적 스승님의 삶에 비추어보면 비교도 안 되지만, 때로는 버거워 울기도 하고 밤새 고민하다 기도하기도 하고, 금식도 해보고, 참 많은 세월을 험악하게 살아온 듯하다.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거친 광야 길을 걷게 하셨을까.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2). 목이 곧은 교만한 이 죄인을 겸손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인간 막대기를 통해 이런 저런 다양한 마음고생과 고통을 겪게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트럭에 충돌하여 목이 부러져 죽다 살아나기도 했다. 그런데 은혜를 잊어버리고 조금 좋아지니까 다시 목에 힘을 주고 은근히 “내가” 하면서 자랑하고 으스대니까 주님께서는 신학교 수련회 중 아예 목을 꺾어 놓으셨다. 두 번 죽음의 문턱을 넘으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겨우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수도자라고 조금 더 봐주시거나 면제해주지 않으신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먹고 사는 것이나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 

모든 것이 형통하고 풍요롭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건강하면 사람이 교만해지기 마련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소유한 만큼 교만해지고 아는 만큼 높아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잊지 않고 더욱 낮아져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연단 하신다. 사람은 고난이 아니면 고질병인 완고한 마음이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시험 풍파를 겪어야 교만이 박살이 난다. ‘자기’(자아)라는 우상단지가 산산조각이 나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고난을 만날 때 주님을 간절히 찾게 되고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며 나오게 된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1:8). 심한 고난으로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던 사도바울처럼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겸손히 고백하게 된다. 마더 테레사의 말처럼 우리는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 “고통은 성장의 법칙이요 우리 인격을 이 세계의 폭풍우와 긴장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고후11:23-27). 

사도바울은 고난이 닥쳐올 때 기뻐하였다(살전5:16-18). 이는 하늘에서 누리게 될 영광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난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도다.”(롬8:18).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가 고생하게 하심이 아니라 광야 연단을 통하여 마음과 행실을 정결케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기 위함이다(롬5:3-5). 또한 우리를 낮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우리도 영적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며 익은 열매가 되어 마침내 천국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라.”(딤후1:8). 성 프랜시스, 십자가의 성 요한 등 고난을 사모하며 고통을 더 달라고 간청하셨다. ‘연단의 불 가운데로 뛰어드십시오’라고 권면하셨던 나의 영적 스승님도 같은 기도를 드리셨다. “사실 저는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고난을 달라고 기도하지요. 저에게는 고난이 다가올지라도 두려움이나 겁에 질리는 마음은 없어요. 성경 말씀 중에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안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지요.” 

인류 역사는 고난의 역사였다. 지금도 곳곳에서 고통의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죄악 세상에서 고통은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필연적이다. 피해 갈 수 없는 고난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이자. 감사하자. 그리고 고난이 몰려올 때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회개의 눈물을 흘리자. 저무는 한 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축복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고통의 무게만큼 하늘의 영광이 더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기뻐하십시오.”

 

박희진